[응답하라 1994 리뷰]
<응답하라1994>는 성장을 다루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응사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허들을 만나고 그 허들을 낑낑대며 넘어서며 한 뼘 키가 큰다. 다른 성장드라마와 다른 점은, 기존의 성장드라마가 고등학생들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고, 그러다보니 고민의 주제가 비교적 단순하고 비슷했다. 반면 응사의 친구들은 성인인 대학생이고 그렇다보니 '성장'이 주제가 아니라 로맨틱코미디처럼 보이는 면도 있지만, 오히려 성인의 성장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장의 주제가 다채롭게 등장한다.
하숙생들이 만나는 고민들은 우리가 삶에서 한번쯤은 만나 보았던 고민처럼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다. -물론 응사는 드라마기 때문에 하나 혹은 두 개의 문제에 몰입하기 위해서 모두가 어느 정도 사는 집 자제들이긴 하다.- 해태는 여자친구가 끊임없이 생기는데도 어릴 적 사귀었던 첫사랑처럼 마음이 오래 가는 사람이 없다. 결혼까지 생각할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해태의 과제로 보인다. 빙그레는 모두가 선망하는 의대를 붙어놓고도 진로 고민을 계속하고 있고, 그 와중에 날카로운 첫뽀뽀의 기억(?)을 가져가버린 동성이 좋아졌다. 쉽지 않은 이상과 안정적인 현실 사이에서 빙그레는 선택을 앞두고 방황한다. 나정은 친오빠처럼 함께 자랐던 사람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변화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쓰레기는 연인관계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내비치고 신뢰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칠봉은 하숙생들 사이에선 가장 성공한 지위를 갖고도 흔히 Default값으로 여겨지는 가족과 사랑 문제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삼천포와 윤진은 자기자신의 문제부터 연인사이의 문제까지 전부 대화로 풀어가는 법을 서로를 통해 배워간다.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서가 모여있는 코너에서 자신이 성공하는 법을 써둔 책을 쉽게 본다. 그 코너를 돌아다니면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일반적으로 하는 고민들이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 에 있는 것 같다. 사회초년생들에겐 '어떻게 취직할 것인가',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인가'와 같은 고민들도 흔하다. 물론 이 문제들은 인생에 아주 크고 중요한 문제들이다. 돈이 없으면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돈을 모으는 사이 시간도 흘러가고 나 자신도 늙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당장 하고 싶은 것들을 당장 하게 되지 못하는 것은 행복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러프하게 풀어놓는 고민들을 보면, 대학생들은 조별과제에서 말안듣는 조원과 나몰라라하는 교수에 '빡'치고, 직장생활에서 무능한 상사와 게으른 동기와 말귀를 못알아듣는 후배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느 연구결과에 따르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에게든 '인간관계'가 그들의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였다고 한다. 고립된 부자는 행복하지 않았고,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했다. 우리 삶의 중요한 과제는 아무래도 인간관계에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인생을 사는 이유는 내 삶의 다양한 면모들을 겪어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면모들은 지루하고 가난하기까지 한데, 저 사람은 부자에 심지어 남편과 아이들과도 행복해보이면 왜 나만 이런가, 싶을 것이다. 모두에게 쉬운 것이 자신에게만 어려우면 하느님이 야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교하면 할수록 내 삶을 다른 삶의 조연으로 만들 뿐이다. 모두의 삶의 과제는 모두 다 다르고, 나는 내 삶에 주어진 조건들을 찾아가고 과제를 만나고 그 과제를 조금씩 넘어가며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 내 삶의 주연으로 사는 방법이다.
응사의 하숙생들은 돈을 벌겠다, 성공하겠다, 는 거창한 허들을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연애, 선배나 친구, 부모님과의 관계를 두고 고민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삶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부차적일 수 있는 고민들을 앞두고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진짜 고민의 모습 그대로이다. 누군가는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열등감에 감추기도 하며, 누군가는 행복한 고민이라 놀림받을까 속으로만 앓기도 하는 우리의 진짜 과제들. 그것들은 단지 다 다를 뿐, 무의미한 것은 없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고민도 없다.
응사 마지막회에서 하숙집의 식구들은 월드컵 경기의 승부결과를 두고 내기를 한다. 대한민국이 '이긴다'에 다들 이름을 쓰는데 쓰레기와 성동일, 칠봉이만 '진다'에 이름을 쓴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쓰레기가 먼저 '이긴다'로 옮아가고 마지막에 칠봉이도 옮겨가는데, 끝내 성동일만 '진다'에 남아 내기에 '진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졸업장으로 보였다. 나정이는 소통이 가능한 인간관계로 발을 내딛으며 처음으로 성장의 발판을 밟는데, 내기에 이기는 곳에 가장 먼저 이름을 쓰기도 한다. 빙그레는 비단 현실적인 문제에 떠밀려 결정하지 않고, 자신의 진짜 마음을 발견한다. 해태는 첫사랑과 재회하며 진짜 사랑을 찾아가고, 삼천포와 윤진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서로의 성장을 견인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쓰레기의 아프다는 문자로 나정과 쓰레기가 재회하면서 쓰레기도 뒤늦게 성장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마지막에서 두번째로 이긴다에 이름을 올린다. 칠봉은 마지막에 자신을 챙겨준 우정 또한 자신이 받은 사랑임을 알고, 또 새로운 사랑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이긴다'에 올리게 된다. 각자의 과제를 해결한 순서대로 '이기는' 쪽에 이름이 써지기에 마치 성장의 학교를 졸업하는 순서같은 것이다.
하숙생들은 각자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응시하고 인정하고 소통하고 신뢰하면서 그 끝에 사랑과 우정을 'win'(얻다, 이기다) 하는 졸업장이 주어진다. 응사는 자기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과제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하찮다 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성실하게 나아가자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성장을 용기내어 이루고 나면, 사랑과 우정이라는 인간 관계의 행복이 주어진다고 위안을 던지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기계발서에서는 말해주지 않는, 우리가 일상에서 이뤄야 하는 진짜 성공이자 성장일지도 모르겠다.
2013년의 겨울쯤
응갤, 블로그에 썼던 글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