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있던 자리

[응답하라1994 리뷰] 회차별 리뷰. 20화

by 소소랍

학창 시절에 배운 소설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작품 중 하나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다. 읽은지 오래돼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머니가 쫓겨나고 새엄마가 들어온 후 자식들이 느끼는 엄마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걸 풍금이 있던 자리, 라 표현하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연말 연초에 대청소를 할 때면 풍금을 들어내고 물청소를 하는데, 그 아래만 색이 진하고 주변은 허여멀건해서 딱 그자리가 표가 나잖는가, 풍금의 존재가. 누군가가 없어지고 그가 갔던 장소를 헤매거나 그의 행동을 추억하지 않더라도 진하고 허연 그 경계만으로 존재가 부각된다. 없어지고 나서 오히려 더욱 뚜렷해지는 가치가.


응사 20화는 누군가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마이콜과 민정이는 쓰레기얘기를 하고 성동일과 일화엄마도 쓰레기가 왜 보이지 않는지 이야기한다. 쓰레기가 드리운 그림자가 극의 분위기를 이끈다. 칠봉과 나정이 함께 있을 때 나타난 빙그레는, 쓰레기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정을 바라본다. 화면 속에서 쓰레기는 보이지 않는데, 그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쓰레기가 있던 자리가 저기라고 알려준다. 그건 쓰레기가 해왔던 역할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빈 자리가 더 커보이게 한다.


나정은 얼핏 괜찮아 보인다. 밥도 잘 먹고 이별선언을 하고는 울긴 했지만 칠봉과 데이트 약속도 한다. 나정이는 쓰레기를 잊었나? 오히려 나정은 쓰레기가 부재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칠봉이 오늘 뭐하냐고 내일 뭐하냐고, 퇴원 후에 뭐하냐고 물으면 그녀는 잠깐이나마 생각을 한 후 시간이 빈다고 얘기한다. 헤어진 후지만 쓰레기에게 줄 약봉지를 들고 다니고,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쓰레기를 만날까봐 계단을 이용하고,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산책을 간다. 나정에게 쓰레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다.


칠봉이는 그런 나정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조른다. 그렇게 며칠을 함께 보내지만 그동안 마주하는 나정에게 나정의 본심은 없다. 칠봉에게 웃어주고 대답하고 밥을 함께 먹지만 그녀의 정신은 다른데 팔려있다. 나정이 가지고 다니는 쓰레기의 약봉지를 칠봉이 발견했을 때, 옆에는 조성모의 '아시나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가시고기', GOD의 '어머님께' 가 같이 카메라에 비친다. 이것들은 모두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연인이 죽고 없지만 연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치즈가 없어지는 걸 알고나서야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아버지의 부재로 깨닫게 된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며 노래한다. 나정은 칠봉의 옆에 묶여있지만 거기에 진심은 부재한다.


삼천포가 칠봉의 병실에 와서 얘기해주는 해태와 쑥쑥이의 이야기는 그대로 칠봉과 나정의 관계에 대입된다. 해태는 지극정성으로 쑥쑥이를 돌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엄마한텐 안되더란 이야기다. 칠봉이는 나정에게 옆에 있어달라 조르기도 하고 늘 세심하게 돌보고 챙겼지만 옆에 없는 쓰레기에 못 당한다. 칠봉의 외로움은 나정을 붙잡을 수록 더 커진다.


칠봉이는 2화에서 모정의 결핍으로 인한 외로움이 드러나는데, 그 빈자리를 나정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소다. 애정결핍은 그를 채울 다른 애정을 갈구하는데서 해소되지 않고 이미 받고 있는 사랑과 관심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칠봉이 나정의 사랑을 갈구하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에는, 다른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보내주는 관심과 우정이 있었다. 칠봉이 나정을 보내주고 친구들의 관심을 받아들이자 그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20화 내내 비어있는 쓰레기의 자리는 쓰레기의 가치를 오히려 부각시킨다. 반면 나정의 허울 뿐인 존재는 그녀의 마음의 자리가 비었음을 보여준다. 둘의 부재는 그들의 마음이 진짜 가있는 곳을 알려주는 지시선이다. 나정에게 쓰레기를 향한 마음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재로 알려지는 진정한 가치, 응사 20화의 연출이 재밌는 이유다.



2013년의 겨울쯤

응갤, 블로그에 썼던 리뷰 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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