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리뷰] 캐릭터 4. 칠봉이
응사라는 이름의 체스판에 말들이 놓여 있다. 비숍은 사선으로 판을 종횡무진하고, 나이트는 여기저기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모두가 자신의 킹을 지키고 적진 킹을 쓰러트려 게임을 이기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여기에 독특한 루크가 있다. 이 루크는 적진의 퀸에게 첫눈에 반했다. 적진의 퀸이 쓰레빠를 딸딸이라 부르고 무서운 경상남도 사투리를 쓰면서도 자신에게 살갑게 챙겨주는 게 어느덧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 루크는 전후좌우 직진만이 가능하다. 그건 그에게 커다란 불행이었다. 자기편의 폰 하나라도 제 앞에 있으면 루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점프를 할 수도, 겅중겅중 뛸 수도 없으니까.
미숙한 적진 루크가 자기편 폰을 없애주자, 루크는 서둘러 적진루크를 잡아버렸다. 이제 몇 번의 직진이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문제는 아무런 설명없이 그녀에게 직진을 하자 적진의 퀸이 당황한 것이다. 도망가는 그녀의 뒤로 적진의 킹이 막아선다. 루크는 적진의 킹을 노려보며 체크메이트를 외친다. 적진의 킹이 비운 자리, 그녀의 옆자리를 이 루크가 꿰찰 것이다!
하지만 적진의 킹은 사선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적진의 킹이 루크가 갈 수 없는 사선의 자리에 서자 루크는 일보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루크는 다만 적진의 퀸이 홀로 전장에 남았을 때 그녀를 조용히 돕기로 한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죽지 않도록 자기 편 비숍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하고, 나이트만 잡을 수 있는 자리에 폰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가 위험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가가 루크는 그녀의 옆에 선다. 그리고 적진의 퀸은 루크를 잡는다.
<응답하라 1994>가 '남편찾기' 구성 속에서 성장하는 각 캐릭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각 캐릭터의 과제는 사랑을 '얻어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캐릭터들이 각자 짝을 찾는 시기와 졸업장에 이름을 적는 순서가 비슷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칠봉의 성장이 '나정의 사랑'을 얻어내는 쪽에 있다면, 칠봉은 실패한 것으로 남는다. 다른 하숙생들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 이름이 불리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때, 칠봉이는 혼자 뉴스 자막으로 이름이 나오고, 21화에서 칠봉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 또한 나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칠봉이가 겪는 문제는 모정으로 상징되는 가족애의 결핍이다. 2화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사시는 분으로 묘사된 점이나 21화에서 칠봉이가 좋아하는 깍두기도 보이지 않는 텅텅 빈 냉장고가 나오는 것을 보면. 하숙집에 등장하기 전엔 다른 사람에게 당연했던 가족의 존재와 애정이 칠봉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칠봉은 4화에서 일화파에게 쑥스러운 표정으로 '어무이'라 부르고 5화에서는 다시 태어나면 정이 넘치는 것 같은 '시골'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칠봉이에게 신촌하숙은 어머니가 항상 계시고 따스한 정이 있는, 그가 무의식에 그려온 가족의 모습이 있는 양지다. 그곳을 상징하는 것이 칠봉이에게는 나정이였던 것.
야구 밖에 없었던 삶에 나정이 나타나서 외로움을 알게되었다는 나레이션을 보면 칠봉이가 결핍된 애정을 나정에게서 채우려 했던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외로움을 알았다는 걸 보면 결국 나정이에게선 애정이 채워지지 않았다. 20화를 보면 나정을 보고 자신이 나정이의 애정이 향하지 않는 그늘에 있다고 느끼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나정은 칠봉이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고,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도 진심은 곁에 있지 않는다.
나정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손가락일 뿐 그 자체가 아니다. 칠봉이는 그걸 알았을 때 그녀를 보내주고 비로소 자신의 과제를 완수한다. 칠봉에게 양지를 찾아주는 것은 21화의 친구들이다. 그가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친구들은 이메일을 계속 보내 '시골의 정'과 관심을 체험케 한다. 어느날 친구들은 집으로 쳐들어 와 굳이 묻지 않고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칠봉이가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도록 옆에 있어주고 비어있는 냉장고를 채워주고, 사랑과 관심을 보내준다.
칠봉이의 성장은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친구들이 보내주고 있는 애정을 받아들이고 그 애정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그 사랑이 칠봉이 돌고 돌아 제대로 밟은 성장의 발판이다. 그리고 멋지게도, 누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가 먼저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뤄낸 성장이다. 칠봉은 김혜수의 플러스유 녹화에서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는 써주지 않은 멘트를 하며, 하숙생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른다. 김춘수의 시처럼, 칠봉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칠봉에게 와서 의미가 되고 외로움을 채워준다.
그래서 2013년의 칠봉이는 말할 수 있다. '우리처럼'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의 첫사랑은 친구들의 우정을 알고 받아들인 것이니까.
2013년의 겨울쯤
블로그에 올린 글을 수정 후 재업
- 칠봉이는 응사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많아 애정이 가는 드라마에서 칠봉이의 캐릭터만 유독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전형적인 서브남으로 등장해서 끝까지 러브라인에 도구로 쓰인 것. 응사는 전형적인 로코가 아닌데, 칠봉이만 왜 전형적인 로코에 등장하는 재벌2세 같은지.
- 제작진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후속작에서는 서브남이었던 정환이가 (비교적) 빠른 속도로 탈락하고 정환이에게 어울리는 서사 마무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