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가진 우리의 감정들

[응답하라 1988 리뷰] 회차별 리뷰. 1화

by 소소랍


그 땐 그랬다. 아들을 낳기 위해 없는 살림에도 자식을 셋, 넷 씩 낳곤 했다. 셋으로 끝나면 선방했다고들 했다, 아들 낳기 위해 여섯, 일곱도 낳는 집도 있었으니까. 중간에 낀 딸 입장에선 셋보다는 넷 이상이 차라리 나았던 건, '아들 낳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긴 존재' 취급을 둘째 혼자가 아닌 중간에 낀 둘 이상의 딸들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없는 살림에 셋째가 아들인 집은 그 몫이 오롯이 둘째 혼자의 몫이었다. 그래서 '둘째의 설움'이 생겼다. 다섯 가족을 부양하느라 오는 부모님의 힘겨움이 가는 곳도, 그렇게 다 주어도 모자른 것들이 좀 덜 가는 곳도, 다 둘째가 좀더 표가 났다.


둘째들은 둘째들끼리 모여 전날의 소식을 나누곤 했다. 전날 밤에 아버지가 들고 들어온 검은 봉다리에 뭐가 들었는지, 같이 먹은 음식이 뭐였는지 같은 별 거 아닌 이야기들. 둘째딸들은 산수를 배우기 전부터 닭다리는 3 빼기 1개 만큼 있다는 걸 알았다. 남녀가 다르다는 걸 머리로 알기 전에 아버지가 사들고 들어온 검은 봉다리에 든 것이 나나 내 언니가 가지고 놀 수 없는, 남자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는데도 왜 할머니에게 자랑하면 안되는지, 다리는 구경도 못한 백숙 담은 그릇을 왜 나만 설거지를 도와야 하는 건지, 하는 것들 말이다.


가족들에게 받는 사랑과 관심,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받지 못한 자에게 그것만큼 잘 보이는 것은 없다. 언니가 자라니까 사주는 새 가방과 새 옷들, 남자애니까 새로 사야 하는 동생의 새 운동화 새 장난감들 사이에 둘째딸에게 주어지는 언니에게 물려 받은 헌 옷, 헌 가방, 헌 운동화, 헌 장난감. 언니에게만 주어진 '작명소에서 지어온 이름'과 동생에게만 있는 액자에 끼워진, 사진관에서 찍어온 돌사진 사이에,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 써져 있는, 안방에서 이불을 구겨 대충 기대 앉혀 엄마가 찍어준 돌사진. 비교가 되면 '없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응답하라 1988> 1화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 있어야 했지만 받지 못한 것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둘째라서 닭다리도 계란후라이도, 월드콘도 먹지 못한 덕선이의 설움, 아버지가 없어 남자들이 아는 것을 배우지 못하는 선우가 걱정스러운 선영의 마음, 아들과 대화가 없어 느끼는 미란의 서운함. 이에 더해 밥먹으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놀다가 흩어지는 아이들의 모습과 집 앞 평상에서 집안 대소사부터 야한 농까지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며 바쁘게 콩나물을 다듬는 엄마들의 손길, 남는 음식을 주고 받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발걸음, 같은 지금은 없는 것들을 보며 느끼는 시청자들의 감정까지. 응팔은 나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없는 것'들에 대한 감정을 상기시킨다.


2015년의 시청자들이 지금은 없는, 혹은 태어나기도 전인 1988년의 풍경을 보며 자신의 감정으로 이입하는 배경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상실'에 대한 공감이 있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크다고, 상실은 그것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오는 대단한 상실감이 아니더라도, 대답을 듣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짝사랑의 경험부터, 나만 빼고 놀러간 친구들이 재미난 이야기를 나눌 때 느끼는 서운함까지, 내게 주어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은 일상에 소소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1988년이 기억나지 않아도, 둘째가 아니어도, 부모님이나 자녀가 다 건강하게 살아 있어도, 선우와 덕선이, 선영과 미란의 감정은 고스란히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고 또 그리움을 자극할 수 있다.



1화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김필, <청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이적, <걱정말아요, 그대>



후회없이 사랑한 자리에 상실감만이 남았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1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이 노래와 가사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인정하고 나아가라고. 상실감은 빈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잊지 못하거나 있어야 했던 당위를 놓지 못하거나 있길 바랐던 기대를 놓지 못하기에 찾아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힘들더라도 지금 없는 것은 보내주어야 하고, 없는 당위와 기대는 놓아주어야 한다. 그렇게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랑이 올 수 있으므로.


빈 자리가 있다면 빈자리를 채우는 것도 있을 터, 응팔은 가족으로 빈 것을 다시 가족으로 채운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는 엄마가 아들과 나누는 살가운 관심으로 채워지고, 엄마와 아들 사이에 있던 대화의 벽은 미란이 터놓는 솔직한 이야기만으로 싱겁게 무너진다. 둘째 덕선의 설움은 아버지의 월드콘으로 채워지는 ...듯 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하하.


연탄가스가 샌 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첫째와 막내를 데리고 나온 후 덕선은 스스로 방을 탈출한 후 동치미까지 찾아 먹는다. 아마 덕선이는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가지 않을까? 이 자리를 채울 사랑을 스스로 찾을 것이기에 아직 비어있는 것은 아닐런지. 마다가스카르 피켓걸 자리는 잃었지만 우간다 피켓걸 자리를 꿰찬 당찬 덕선이니까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는다.




2015년 응팔 1화가 끝난 후

응팔갤에 썼던 리뷰 퇴고 후 재업


- 응팔 리뷰는 한 편 쓰고 리뷰 쓰던 곳이 싸움이 격화되어 더이상 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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