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44번의 글
안녕하세요. 소소랍입니다.
이 글은 브런치에 작가 등록을 하고 처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저를 간단히 소개해 보려고 해요.
저는 박사과정을 하다가 휴학을 하고 지금은 애만 보고 있는 가방낀근주부입니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영화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리뷰하는 척 삶에 대한 얘기하고 음악 얘기하는 척 삶에 대한 얘기하는 글을 쓸 예정입니다. 가끔 책 리뷰 쓰는 척 삶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네, 사실 작곡가와 감독과 작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제 삶 얘기하기 바쁜 개똥철학자인 것이죠.
요즘은 저출산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학부를 경제학과를 나왔는데요, 전공책에 보면 자본과 노동시장을 요소시장이라고 한단 말이죠. 요소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의 공급자가 기업이고 수요자가 소비자인 가계인 것과 반대로, 공급자가 가계이고 수요자가 기업인 노동시장이 있고, 자본이 그 요소인 자본시장이 있습니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 기계를 사들입니다. 기업에서 자본을 수요하고 있군요. 보통 기업에서 큰 돈 들여 자본을 사들일 때 기업 차원에서 그것을 '투자' 개념으로 이야기하죠. 사업 확장을 위한 공격적 투자라든가, 인프라 확충을 위한 투자, 같은 단어는 신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개념이에요. 투자는 무엇일까요, 이만큼의 돈을 들였지만 나는 더 많은 것을 여기에서 만들어낼 것이다, 수익을 낼 것이다, 하는 늬앙스가 있죠. 그러니까 기계를 사들이면 너무 빠르게 노후하지 않게 관리하고 적당한 시간에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작동시키겠지요.
요소시장의 양대산맥인 노동시장을 볼까요. 기업이 마케팅을 위해 인간을 하나 고용하기로 합니다. 기업이 노동을 수요하고 있군요. 이것도 자본을 대체해서 문장을 써볼까요? 사업 확장을 위한 공격적 고용, 사업을 위한 초기 고용투자, 라는 말은 쓰면서도 어색하군요. '노동'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불리한 처우', '노동시간', '노동환경' 같은 단어들이 검색에 떠오르네요. 노동시장에서 기업의 불경기와 함께 검색되는 단어는 '구조조정'입니다. 기업이 상황이 안좋아지면 노동을 수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노동과 투자는 왠지 어울리지 않네요. 노동에는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요.
'소비'입니다.
더워서 길 가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삽니다. 첫 입은 너무 달고 시원하죠. 중간까지는 허겁지겁 먹습니다. 그러다 4/5 지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질리는 느낌이 찾아옵니다. 약간 추운 것도 같아요. 이제 그만 먹고 싶습니다. 그럼 1/5 남은 이 아이스크림을 버릴까요? 1000원이나 주고 샀는데? 왠지 아까워요. 게다가 거의 남지 않았어요. 그냥 먹기로 하죠.
아이스크림에 '투자'를 했다면 어떨까요. 투자는 가치변동을 염두에 둡니다. 장래에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고,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죠. 투자에는 리스크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단 사버렸으면 남은 재화는 가치가 올라가기를 바라겠죠. 그러므로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을 수도 있겠죠. 남은 200원 어치의 가치가 상승하여 내가 투자한 1000원을 회수할 수 있게 해줄지 모릅니다. 남은 1/5의 아이스크림은 집에 돌아가 냉동실에 보관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이스크림 소비와 투자의 차이점은 '내재가치의 변동가능성' 그리고 현재 시점의 자산의 변동여부입니다. 1000원을 투자하면 현금자산은 줄어들지만 불안정한 투자자산으로 자산형태가 변화할 뿐 자산이 줄어들지 않죠. 그리고 1000원으로 산 불안정한 자산은 장차 500원이 될 수도 있고 1500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1000원으로 소비를 하면 내 자산 중 1000원의 자산은 형태 변화없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재화에 들어간 1000원의 가치는 +-1000원의 효용을 줄지언정 장차 500원 혹은 1500원의 자산으로 변화하지 않죠.
노동이 투자였다면 기업은 노동에 현금자산을 지불하고 노동이 어느 이상의 가치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겠지요. 그리고 더 큰 가치를 가지도록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은 기업에 속한 자산이기 때문에 24시간 돌려서 혹사시켜서 수명을 짧게 하지 않을 거에요.
사회가 노동을 대하는 방식이 노동투자가 아니라 노동소비에 가깝다는 말은, 노동을 자산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에 내재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노동투자가 아니라 노동소비가 되면, 노동은 가치가 변화하지 않을 뿐더러 그 가치는 기업에 속한 자산이 아니라는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죠. 그러니 기업은 노동을 최대한 '소모'하는데 주력합니다. 네, 사회는 노동을 소모합니다. 효율적인 선을 가르는 가성비를 운운하지 않고,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선까지 노동을 쓰고자 합니다.
그래서 노동을 수요하는 계약은 '연단위'로 '성과제'로 한 다음, 야근과 철야를 당연시하여 '최대한'의 근무시간을 요구합니다. 그 속에 '효율'과 '경제논리'는 없어요. 이미 지불해버린, 혹은 '사라져버린' 현금자산을 대신하여 '최대한'으로 소모하려는 계획만이 존재합니다. 최초의 1시간이 10만원의 가치창출을 가져오고 8시간이 지났을 때 추가적인 한시간이 고작 1천원의 한계가치창출을 가진다 해도 기업은 상관이 없습니다. 한국에서연봉계약이 기업에 가져오는 장점(?)이죠. 효율적인 한계생산극대화보다 총생산극대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추가 한시간에 추가적으로 들이는 비용이 없으므로, 기업은 노동하는 개인의 추가적인 한시간을 뺏어 20만원을 20만 1천원으로 만드는 것을 추구합니다.
기업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요? 하지만 사회는 그걸 용인해서는 안되죠. 왜냐하면 노동이 소모되는 '재화'가 되는 순간, 사회에 속한 무수한 개인이 물화되어 인격이 사라져 버리거든요. 사회에는 생산과 소비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도 있고 문화도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낳는 부모가 있습니다. 노동으로 소모되는 것은 기업과 최초에 계약한 노동력만이 아닙니다. 기업은 노동시간을 늘리고, 개인은 그 노동시간을 충당하기 위해, 정치, 문화, 혹은 장래의 노동가치증가를 위한 교육에 투자했어야 할 시간을 줄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들어가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태어난 직후부터 약 백일까지 수면시간까지 잡아먹힙니다. 그 후에는 보통은 잠은 잘 수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면 깨어난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기저귀 갈아입히고나서 놀아주는 시간만이 아이에게 들어가는 시간일까요? 아이는 자주 아픕니다. 아프면 안먹죠. 그러면 이제 부모의 정신적 노동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내일 뭐먹이지? 내일 이거 먹이려면 뭘 장봐놔야 하지? 부모의 순 정신적 노동시간은 아이가 클 때까지 순수하게 늘어납니다. 아이가 6살이 되면 영어교육의 문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수학과 국어교육의 문제가, 사춘기 즈음이 되면 인성교육의 문제가 그저 '추가'됩니다. 정신적 노동을 안할 때는 여전히 아이 밥을 해먹이고 아이와 놀아주거나 숙제를 시키는 노동이 그대로 있죠.
노동시간이 주어지면 거기에 먼저 응하는 것은 '아빠'의 노동입니다. 보통 육아와 가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돈 버는데 주력하는 것이죠. 그렇게 아빠가 빨리 퇴근해도 집에 7시에 오는 삶이 되면 엄마의 육아는 어떨까요. 보통 아이 밥을 하고 아이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엄마이므로, 아빠가 일에 묶여버리면 육아의 '정신적 노동'은 순수하게 엄마의 몫이 됩니다. 아이가 어느 학원을 가야하는지 고민하고, 알아보고, 상담을 받고 새벽같이 줄서서 인기강좌에 등록하고 그후 스케쥴관리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 되죠. 이제 아빠가 회사에서 야근하고 회식하는 동안 엄마는 대치동 차안에서 샌드위치 먹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 속에서 부부의 대화시간은 어디로 갈까요. 국문학과를 나온 엄마의 머릿속을 감돌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디로 갈까요. 아빠와 아이가 함께 노는 시간은 어디로 갈까요. 아이가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내밀고 실패해보는 경험은 어디로 갈까요. 인간관계와 그를 유지하기 위한 대화, 그리고 꿈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가지는 '인간성'을 만드는 구체에 다름 아닙니다. 회식하면서 알코올에 죽어가는 아빠의 뇌세포처럼, 노동시간이 저녁시간을 넘는 순간 노동은 인간성을 삭제합니다.
기업은 노동과 자본이라는 요소를 통해 자신의 수익을 만들어냅니다. 노동과 자본의 수요를 막을 수는 없죠. 하지만 그게 어느 선을 넘으면 안되는지를 사회는 면밀히 검토하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합니다. 기업이 노동을 지나치게 소모하면 사회에 인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재화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재화는 문화생활을 할 여력이 줄어들어요. 재화는 연애하지 않아요. 재화는 아이를 낳지 않아요. 재화는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퇴근하고 잠이 들기까지 고작 세시간이 안되는 시간동안 재화는 또다른 가치를 생산하기보다 현재의 삶을 회피하고 도파민을 빠르게 충전하기를 선택합니다. 재화는 또다른 무언가를 소비합니다. 그렇게 또다른 물화를 낳죠.
사회 전체가 서로를 끊임없이 소모하려는 사회가 됩니다. 처녀성에 집착하다 소아성애까지 소비하는 사회를 봅니다. 반반통장에 이어 반반결혼까지, 사랑에 침입한 가성비 논리를 봅니다. 누가 봐도 기괴한 논리에 확성기 대주는 언론과 플랫폼의 행태들을 봅니다. 서로를 소모하는 사회는 재생산을 멈춥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출산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을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른 척합니다.
그 중 한 플랫폼에서 도망쳐 나와 이 곳에 왔습니다.
정치에 관심없으면 당선되기 쉬운 사람들과 노동에 가야할 돈을 정치권에 투입하여 노동을 더 쉽게 소모하려는 기업들, 국가 재산 팔아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는 공권력, 그들에게 빌붙어 자기 재산 지키기 급급한 언론권력, 은 사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죠. 그런 사람들이 친일파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요.
그런 것들을 경계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2024.10.23
며칠 고민하며 여는 글을 씁니다.
- 이전 블로그에서 글을 옮겨오느라 한동안은 글 올리는 주기가 짧을 것 같습니다.
- 글을 다 옮겨오면 대략 일주일에 하나 정도의 글을 발행할 예정입니다.
- 제 이름은 어슐러르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두 캐릭터의 이름을 합친 것이에요. 의미는, 어슐러르귄을 향한 제 애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