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에 주의하자.
직장생활은 누구에게나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생계수단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직장은 단순한 생계를 넘어, 내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의미 있는 장소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10억을 줄 테니 집에만 있으라고 제안한다면, 나는 오히려 적은 월급을 받더라도 흥미로운 일과 환경 속에서 내 삶을 보내고 싶다. 물론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일을 지속하는 근본적인 동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 커리어를 쌓고 싶다.
“To know oneself is the beginning of all wisdom.”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커리어 초반에는 회사의 산업, 이미지, 부서, 연봉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우선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내 삶의 방향성과 내 본질을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후에야 비로소 직장이나 연봉 같은 요소들을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직장에서 역량(Capability)과 명성(Reputation)을 핵심 요소로 본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역량보다는 ‘열심히 하는 태도’가 명성을 좌우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입사원은 당연히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그 과정에서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가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진정한 성실함으로 성장한 사람과 단순히 ‘열심히 하는 척’한 사람의 내재된 역량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중요한 점은,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역량이 쌓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명성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친분이 많다는 이유로 과대평가되기도 하고, 이런 유대를 넘어서 상처받을까봐 주변에서 직접적이고 건강한 실력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신입사원 시절, 독기를 품고 열심히 했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단순히 시간을 오래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력이 출중한 선배들, 고객사의 실무진 등 그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나의 역량이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어 실력도, 실무 지식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평가가 나의 역량을 증명하는 것이라 착각했다. 나는 이것을 ‘버블’이라고 생각한다.
업무를 하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좋은 이미지가 구축된 뒤로는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내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주식시장과 비슷하다.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가 변한 것은 없는데,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주가가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것과 같다. 실력이 뛰어난데도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실력보다 높이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메타인지(meta-cognition) 다. 자신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만 어떤 방향으로 역량을 쌓고 성장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실력을 키울 수도 없다. 그렇기에,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때때로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내가 스스로 업무에서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었다고 판단될 때는, 새로운 업무 역량을 쌓기 위해 부서를 이동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역량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경우, 그 업무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다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커리어에서 변화를 결정할 때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내가 회사에서 동료와 상급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서를 떠나는 것이었다. 사실, 업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동료들의 피드백이 좋지 않을 때는 오히려 이직이나 이동을 고려한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대개 나의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정적 평가를 받을 때는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단순히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실력이 인정받을 수준이 될 때까지 버티고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상급자들이 내 역량을 인정해 줄 때는 당연히 이곳이 내게 적합한 자리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평가가 진정으로 나의 실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친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일이었다. 후자의 경우, 즉 내가 뛰어난 실력보다는 원만한 인간관계나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 조직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궁극적으로 친분만으로는 커리어를 설계할 수 없고, 조직 내에서 담당 임원까지 올라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만약 운 좋게 높은 직급까지 올랐다 하더라도, 실력 없이 관계에 의존하는 리더는 장기적으로 조직에도, 본인에게도 큰 부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이 조직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내 실력 때문인가, 아니면 관계와 환경 덕분인가? 만약 후자라면, 지금 당장은 편안하고 안정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인 커리어를 위해서는 조금 힘들어도 나에게 적합한 환경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 끝에 나는 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미리 방향성을 설정하고, 장기적으로 내 기질과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커리어를 준비했다. 같은 산업이나 유사한 업무 영역 안에서도, 내 실력과 기질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며, 내가 장기간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했다.
어려운 변화구를 치는 것도 멋지지만, 쉽게 홈런을 칠 수 있는 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때때로, 역량이 지속적으로 부족한데도 배우려는 의지가 지나치게 강하거나 자존심이 앞서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이런 노력 아래서 경쟁력 있는 역량이 쌓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이런 경우, 팀원들은 말도 못 하고 결국 조직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있다.
사람마다 반드시 잘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다. 무언가를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빛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에 대해 가혹하게 평가할 것도, 지나치게 긍정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나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더 알면, 미래를 조금 더 쉽게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