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말리는 기다림
아이는 서울대학병원에 가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전해 듣고 나서 발작이 더 심해졌고 다인실에서 다시 간호사실 옆 안정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거기서 간호사가 안 보는 사이 변기를 가리고 있는 가림막 위로 올라가 뒤로 떨어지는 자해를 시도했다. 또다시 허리와 엉덩이에 골절이 생긴 것이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고 똑같은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병원 안에는 안정실보다 더 안전한 다른 공간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과하는 간호사에게 비용이 얼마가 들든 부담할 테니 아이의 안전을 위해 안정실 안에 있는 가림막을 제거하고 천장에 레일이 달린 커튼으로 대체하면 어떨지 건의를 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 그건 어렵다고 했다. 가림막이 벽과 일체형으로 붙어 있어 벽 자체를 뜯어내고 새로 벽을 세워야 하는 대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우선은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매트리스를 가림막 주변에 깔아 놓았고 최대한 아이를 간호사들이 주의해서 볼 테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담당 의사 선생님도 약을 다르게 쓰고 있으니 기다려 보자고 했다. 우리 부부는 의사 선생님이 정한 기한인 일주일을 지나 2주 정도를 답답함과 초조함으로 보내야 했다. '대체 아이의 병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병명이 있기나 한 걸까?' '치료가 되는 병인가?'
얼마 안 있어 담당 의사 선생님은 회진 시 아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다. 거기에는 '측두엽 뇌전증'에 대한 증상들이 적혀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증상에 대한 확인과 함께 앞으로 아이의 상태에 따라 용량을 서서히 증량시킬 계획이라고 아이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을 아이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나는 '측두엽 뇌전증'과 관련된 증상을 핸드폰으로 폭풍 검색을 했다. 기다리는 내내 아이 아빠와 나는 제발 그 병이 맞길, 그리고 아이의 증상이 약으로 조절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안도'와 '의심' 사이를 수백 번은 오고 갔다. 단순히 '측두엽 뇌전증'이라 보기엔 아이의 증상이 백 프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충동이 올라오면 참지 말고 간호사실에 즉각 즉각 최대한 솔직하게 알리라고 당부했다. 뇌전증 약이 아이에게 잘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 뇌전증인지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어 아이에게 뇌파검사를 해 주시길 간호사실로 건의했으나 담당 의사 선생님은 뇌파 검사로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안 해도 된다고 하셨다. 측두엽 뇌전증이 맞다면 1주일 정도 지나면 약에 반응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상담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올초에 아이의 심리검사지 MMPI의 수치들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아이가 그동안 보였던 증상들을 고려해 봤을 때 아이의 병은 '경계성 인격장애'일 확률이 높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되기 전 청소년에게는 '경계성 인격장애'라 진단자체를 내릴 수 없어 대학병원 담당 교수님이 내린 '청소년기 정서장애'라는 진단이 아이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었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아직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뇌가 자라 가는 중이기 때문에 대다수가 '경계성 인격장애'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병이 맞다면 아이를 단번에 치료할 수 있는 약은 딱히 없다고 했다. 약이 잘 안 듣는 질환에 속한다고 했다. 정신과 약의 도움보다는 '변증법적 심리상담'이 가장 효과적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그동안 정신과 약이 별 소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발작'이 일어나기 전 아이에게 '전조증상'이 있고 발작한 동안의 일을 기억 못 할 때도 있으며 발작 시와 발작 후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극단적으로 인격이 변하는 경우들을 봤을 땐 '경계성 인격장애'로도 완전히 설명이 안된다.
아이는 분명히 감정, 기억, 언어처리를 담당하는 '측두엽'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전조증상'으로 이상한 생각이나 느낌이 스치면서 '죽어, 뛰어내려'라는 환청 비슷한 지시하는 내용이 자신을 압도해서 단시간 그 행동을 통제할 수 없고, 발작 시 기억에 문제가 있으며 저녁마다 불안과 공포, 초자연적 감각이 과도하게 자극되어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증상은 밤에 특히나 더 심했다. 뇌를 식히는 기능을 하는 아티반 주사를 맞아야 발작이 가라앉았다. 측두엽 뇌전증이 맞다면 어쩌면 아이는 임신 6개월 무렵 태아로 있을 때 측두엽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었다. 그 시기는 뇌가 완성되어 가는 중요한 시기인데 그때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며 아이를 거의 유산할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코로나를 중학교 1학년 때 앓았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측두엽이 급격히 악화가 되었을 수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측두엽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기질적으로도 예민하고 불안이 높은 아이이기에 유아기 때부터 같은 상황이 더래도 보통의 아이들보다 몇 배나 큰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10살 무렵부터는 뇌기능적으로도 이상 증상에 시달려 왔을 가능성이 컸다. 죽으라는 환청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아이가 밤마다 혼자 견디어 왔고 중학교 자퇴를 하면서 병이 드러났으며 최근 1-2년 사이에는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져 아이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원해서 대학병원 보호병동에 입원을 한 것 같았다.
뇌전증(간질)에는 보통 '카바마제핀' 계열의 약을 먼저 사용한다. 이 약을 사용하고 2주 가까이 되자 아이는 많이 졸리다고는 했으나 눈에 띄게 안정이 되었고 더 이상 충동이 없으니 퇴원시켜 달라고 날마다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적어도 한 달은 지켜봐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하루에 기본적으로 다섯알은 먹어야 했던 아티반 정을 하나도 먹지 않고도 아이가 안정적으로 2주를 보냈다는 건 분명 희망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