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으로 검증된 지표 VS 개인적인 직관과 확신
두어 시간 기다림 끝에 진료실에 들어서자 누구 교수님의 소개로 왔다고 하니 걸걸하고 투박한 대구 사투리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잘 안되면 자기에게 어려운 환자들을 보낸다고 툴툴거리시면서 그동안 처방받았던 약들을 꼼꼼히 살펴보셨다. "그래, 니는 왜 죽고 싶은데?" "세상이 좇갔나? 아니면 니가 좇갔나?" 하고 심플하게 정곡을 찌르듯이 물으셨다. 아이는 세상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다시 여러 질문을 하시고 아이의 대답을 들어보시더니 "뭐지?"하고 반문하셨다. 정신과에서 다루는 모든 증상이 아이의 입에서 종합세트처럼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혹시 충동 전후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변합니까?" 하고 우리 부부에게 물어보셨다. 너무나 아이의 증상에 맞는 표현에 즉각 공감을 하면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단 아이의 배경과 자라온 환경을 고려해 몇 층 병동으로 갈지 정해주셨고 아이에게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내가 약으로 치료해 주께." 하고 확신을 주셨다.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은 그동안 없었기에 나는 너무나 고마웠고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병동으로 올라가 여러 절차들을 거치고 마침내 아이를 보호병동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남자 간호사와의 면담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동안의 아이의 병력을 모두 다 상세히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도 신뢰가 갔다. 우리 부부는 편의점에서 전화기 카드와 간식 카드를 충전해서 빠진 물건과 함께 전해주고 다시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여느 때처럼 전화가 왔다. 아이가 탁자 위로 올라가 뒤로 떨어지는 것을 다행히 간호사가 뒤에서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일인 안정실에 대부분 있지만 잠시 나온 사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아이는 그곳에서 같은 또래 친구들도 사귀고 언니도 사귀었고 그들이 아이의 감시자가 되어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고 하더라도 즉시 간호사실로 알려 주어 사고가 당분간 방지가 되었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었다.
대구에서 아이가 열흘 정도 그렇게 지낸 어느 날 예상보다 빨리 서울대학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의 케이스가 특별해서 입원순서를 많이 앞당겨 차례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분명 아주 좋은 특혜를 받았지만 그 특혜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당연히 서울대학병원으로 가길 원했고 아이 아빠도 누구나 알아주는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는 입장이었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으로도 그랬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대학병원의 입원제의를 한 번은 미룰 수 있으니 여기 대구에 계신 의사 선생님께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을 먼저 충분히 드리는 것이 일의 진행 순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번 미루면 6개월은 걸릴 수 있다는 말에 나도 많이 망설여졌다. 남편과 치열하게 두세 시간을 머리를 맞대고 상담사인 친구의 의견도 들어보고 나서 우리는 일단 병원 측에 전화해서 우리의 상황을 솔직히 의사 선생님께 전달해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담당 의사 선생님의 의견이 어떠하든 믿고 따르기로 했다.
담당 간호사가 의사 선생님과 연락을 취한 후 우리에게 전달한 것은 지금 아이에게 접근방식을 달리해서 기존에 썼던 약과는 완전히 다른 약을 쓰고 있으니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일주일이 되기 하루 전에는 서울대학병원으로 입원하러는 들어가야 했다. 날짜가 하루 차이로 겹쳐 있어 어느 하나는 버려야 다른 하나는 완전히 취할 수 있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진을 자랑하는 서울대학병원이냐 대구의 작은 병원 일개의 의사 선생님을 선택하느냐는 순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나는 서울대학병원 입원이 6개월이나 미뤄지더래도 아이를 약으로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대구 의사 선생님께 일주일이 아니라 2주, 아니 못해도 한 달 정도는 시간을 드려야 한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새로운 약이 아이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보통은 2주는 걸리고 길게는 한 달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기존에 아이가 일 년 동안 다녔던 대학병원의 담당교수님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 분이었고 담당교수님도 이분께 치료받고 나았던 병력이 있으셨다.
물론 이성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이 일은 누구나 쉽게 '서울대학병원'이라고 말할 것임은 알고 있다. 거기에다 보통 서너 달은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하고 많게는 일 년을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인 입원자리가 2주가 안되어 연락이 왔으니 특혜도 보통 특혜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특혜를 받을 만한 인맥이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서울대학병원 소아정신과의 입원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No"라고 한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순전히 나의 직감과 확신을 따라 대구 정신병원에 있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고 거기다 얼토당토않은 배짱까지 부렸다. 말은 6개월이라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게 더 일찍 다시 입원제의가 올 수도 있다고 남편에게 큰소리쳤다. 아쉬운 입장은 우리가 아니라 서울대학병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희미하게 드는 것은 왜일까? 그래도 모든 안 좋은 경우의 수까지 책임지는 마음으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대구에 계신 의사 선생님을 믿고 확신하고 있으니 서울대학병원은 미루자고 말했고 갈등하던 남편도 나의 확신을 말없이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