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의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도
전날의 고비를 넘긴 후 아침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이대로 아이를 집에 두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감당하기 힘들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기에 아이를 불러 아이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했다. 아이 아빠는 지금의 상태로는 이번 주말에 약속되어 있는 친구와 야구경기장을 가는 것도 취소하고 보호병동에 가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운을 떼었다. 우리는 아이가 무조건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겠으니 보호병동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와의 약속은 취소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반발심까지 보였다. 이에 근심이 되어 가만히 있었는데 아이가 엄마의 의견을 물었다. 어젯밤처럼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잘 걷지도 못해 더 이상 너를 붙잡을 수도 보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보호병동에 보내지 않을 건지 또 묻길래 최소한 아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하니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짧고 단호하게 보호병동으로 가자고 했다. 대신 안산이 아니라 담당 교수님이 전에 추천해 주신 대구에 있는 병원의 보호병동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말없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아빠의 속마음은 아이를 보호병동에 보내기 싫었기에 아이가 울고 떼를 쓰면서 자기에게 매달리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질 않았다. 엄마인 나는 아이의 의사에 반해서까지 반강제로 보호병동에 입원시키기는 싫었다. 그래서 강요하지는 못하고 아이를 잠잠히 지켜보면서 엄마의 입장만을 담담히 아이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 치료의 효과를 위해서도 나중에 서로의 관계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최선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어찌 되었던 아이가 대구에 있는 보호병동으로 스스로 가겠다고 했으니 다행이었다.
대구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거기의 상황이 또 어떨지... 멀리 대구까지 가서 아이를 보호병동에 입원시킨다는 것 자체가 부모로서 마음이 아린 일이었다. 반면 아이는 대구까지 가는 내내 잠을 잤다. 달리는 차 안에서 충동이 올라와 서로가 힘들어지는 것보다 백배는 나았지만 평소에 고집이 강한 아이가 어떤 원망이나 불평, 두려움이나 실망도 말하지 않고 꾸벅꾸벅 잠을 자는 것조차 아파 보이고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교수님이 전에 추천해 주셨던 선생님이 계신 대구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 것 자체에 감사했다. 작년 말부터 교수님이 한 번씩 우리에게 권하였으나 아이가 완강하여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급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무리하지 않고 아이가 자발적으로 걸어서 보호병동으로 동의입원 하는 것을 나는 가장 원했었다.
작년에 차도가 별로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교수님이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딱 하나 '전기치료'가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의료파업 때문에 전공의가 없어서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기다리기 힘들고 아이의 치료의 시간을 앞당기기 원하면 전기치료를 한번 시도는 해 볼만은 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전기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대구에 있는 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인 나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아이가 계속 싫다고 하는 상황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구까지 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먼저는 담당 교수님이 아이의 입원을 막으시면서 우리는 서울의 응급실들을 돌아다녀야 했고 서울대형병원들 외래에 가도 입원자리가 없어 기다려야 했으며, 안산의 2차 병원 보호병동에서 아이가 있지 못하고 나와 2차 병원의 보호병동은 다시는 절대 가지 않으려는 상태에서 어제와 같이 아이가 위험에 처해 내가 크게 다치고 나서야 아이가 대구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모두 불행해 보였으나 이 모든 상황이 맞물려 아빠와 아이가 설득되어 결국 대구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대구 정신병원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것보다 병원은 훨씬 크고 시설도 깨끗했고 전문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접수하고 교수님이 추천해 주셨던 의사 선생님 방문 앞에서 순서가 되길 기다렸다. 한 명 한 명 다소 오래 상담을 하셔서 대기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분이셨고 걸걸한 대구 사투리로 환자에게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으나 아이가 거부감을 기다리면서 쌓아가고는 있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되어갈 때 아이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게 보여 아이 아빠는 일어나 간호사 데스크로 갔다. 이렇게 더 기다리면 아이가 곧 발작을 할 텐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절대 '협박'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간호사는 그제야 다음 차례에 바로 들여보내 주었다.
전날의 고비를 넘기고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니 결정은 내렸으나 마음의 결심이 필요했다. 조용히 나의 기도의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이는 안산에서의 경험 이후 2차 병원 보호병동을 가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보호병동이든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의견을 확고히 해야만 했다. 그래야 아이가 부모를 믿고 따라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흔들리면 안 되었다. 나는 근처 정신병원의 자리를 알아보는 대신 전부터 교수님이 소개해 주셨던 병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곳은 멀리 대구에 있었다. 아마 아들을 멀리 군대에 보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이 이런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이 되었다.
나는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멀리 보내기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딸이 아프게 태어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나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찌 되었든 딸은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비록 그곳이 어쩌면 평생 정신병원 안 일지라도...(운이 좋으면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치료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딸과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곳에서 딸은 그곳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의 삶을 살며 성장해 가야 하고 나는 나대로 여기서, 그리고 아이의 아빠도 아빠대로 작은 딸을 돌보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냉정하지만 필요하다. 이것이 그날 아침에 남편과 의논하기 전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