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찬희는 아침의 포근한 햇살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자신의 눈을 비추는 것을 느끼고는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오늘이 은영언니 딸 졸업 작품 발표회 날이지?"
찬희는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메모지들과 노트북, 그리고 어젯밤 읽다 만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책이 놓여 있었다.
찬희는 책상 속에 밀어 넣은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그리고는 책을 집어 들어 어제 읽던 부분을 펼쳤다. 눈으로 책을 읽어나가던 그녀는 잠시 눈의 흐름을 멈추고는, 입으로 책의 글귀를 조용히 읊조렸다.
"나를 살린 건 앞으로 나아간 그 한 걸음이야. 한 걸음, 또 한 걸음…… 언제나 그 한 걸음으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책을 몇 페이지 더 읽은 찬희는 살며시 책을 덮고 거실로 나갔다.
평일임에도 모처럼 시간을 낸 선희가 소파에 앉아 찬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일어났어?"
"응, 언니도 쉬는 날인데 좀 더 있다 일어나지 그랬어?"
선희는 마시던 커피를 잠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더라. 그나저나 뭐 하러 돈을 그리 많이 넣었어? 서후한테 들어갈 돈도 많을 텐데..."
찬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부지점장 되고도 축하 인사도 못했는데, 뭘. 그냥 친구들이랑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나 사 먹어."
어린 시절부터 항상 선희에게 받기만 한 찬희는, 이제 이 정도의 호의쯤은 대수롭지 않게 베풀 만큼의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이 내심 뿌듯해졌다.
입에 미소를 지은 찬희는 서후의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서후를 사뿐히 흔들며 말했다.
"서후야, 일어날까?"
잠에 취해 있던 서후는 눈을 비비며 겨우 눈을 떴다.
"어... 엄마."
"그래 서후야, 일어나서 세수하고 올래? 엄마가 서후 좋아하는 계란말이 해 놓을게."
세수를 마친 서후에게 밥을 먹인 찬희는 서후를 꼭 안아주며 학교 등굣길 배웅을 마쳤다.
졸업 작품 발표회는 늦은 오후에나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스크린에 자신의 이야기가 비춰질 거라 생각하니 찬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빠르게 뛰던 심장은 더욱 큰 소리를 내며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찬희는 두근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식사 후 나온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마무리했다.
이윽고 서후가 학교에 갔다 오자 찬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글 쓰는데 몰두하느라 질끈 묶기만 했던 머리를 오늘은 한껏 늘어뜨려서 예쁘게 손질했다. 면세점에서 근무할 때처럼 풀메이크업까지 마친 찬희는 서후의 손을 잡고 대문 밖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희가 운전할 차 안에는 그동안 외출을 삼가였던 엄마도 함께 했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나들이가 된 것이다. 차에 앉은 엄마를 보며 찬희가 말했다.
"엄마, 몸도 불편할 텐데 영화 보기 안 힘들겠어?"
그러자 엄마가 옆에 앉은 서후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예쁜 서후 엄마가 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이 할미가 안 가볼 수 있나. 그치, 서후야?"
그러자 서후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할머니. 저도 빨리 보고 싶어요."
기대에 찬 서후의 눈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서후를 바라보며 찬희도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어 보였다.
선희의 차가 학교에 다다르자, 찬희의 눈은 진우와 함께 다니던 일본어학원이 있던 건물로 향했다.
학교 앞에 있던 학원 건물에는 이제 일본어학원 대신 스터디 카페가 입점해 있었다.
'아... 그 학원도 이제 없어졌구나.'
찬희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차가 서서히 정문으로 들어서자, 그 시절만큼이나 유난히 파릇한 나뭇잎 냄새가 가득하며 학교의 전경이 펼쳐졌다.
졸업 후 16년 만의 캠퍼스는 학교 주변만큼이나 확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못 보던 사이 새로 들어선 건물들도 보였고, 자신이 다니던 인문사회학과 건물에는 나래관이라는 간판도 새로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의 풋풋한 모습만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자신의 눈에는 아직 어려 보이기만 한 싱그러운 학생들을 보자 찬희는, 진우에게 처음 말을 건네던 그때를 떠올렸다.
종이에 베어 손가락에 피가 나자 자신에게 반창고를 준 그 어린 진우를 말이다.
고마운 진우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네자, 진우는 머쓱해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금의 이 길을 뛰어갔었다.
'뭐가 그리 부끄러웠던 건지...'
찬희는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에 서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서후야, 여기 엄마랑 아빠가 다니던 학교야. 신기하지?"
그러자 눈이 동그레진 서후가 엄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와! 엄마랑 아빠 여기 다닌 거야? 아빠도 지금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엄마"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아빠는 어딘가에 숨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야.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