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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찬스 Oct 19. 2024

[소설 6화] 세상은 넓고도 좁다.


상품을 받아 든 손님이 탑승한 10번 탑승구의 전광판에는 도착지가 괌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작년 , 찬희는 진우와 함께 괌으로 결혼 5주년 기념 여행을 떠났다. 뱃속에는 임신 6개월 차의 서후가 함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당분간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던 인생 선배들의 조언도 있었기에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 기념 및 태교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마침 비행기 티켓이 특가로 나와 있어서 서둘러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다.

초기에 그렇게 심하던 입덧도 거의 사그라들어서 비행기 타는 데도 큰 문제가 없었고, 괌의 음식을 먹어도 속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한 느낌의 섬에서 두 사람은 편안하게 여행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먹을거리를 사러 간 마트 안에서 찬희는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자꾸 자신을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한국 여행객이 많은 괌의 마트 안이라 그중의 한 명이겠거니 하고 찬희는 무심코 그 사람을 지나쳤다.

그런데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인데도,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싶어서 고개를 돌려 다시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석훈이었다.
대학 선배 이석훈.

"어머! 선배! 우와! 외국에서 아는 사람을 다 만나네!"

너무 신기했다.
이런 곳에서 석훈 선배를 만날 줄이야.


찬희가 대학교 3학년 때 석훈은 군대를 제대한 후, 찬희와 같은 학년으로 복학을 했다.

워낙 힘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체구도 좋았던 석훈은 처음 본 순간부터 찬희의 눈에 확 띄었다.
아니,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모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석훈 선배는 아쉽게도 식품영양학과에서 제일 예쁘다는 소연 선배와 이미 커플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강의실에 미리 와서 책을 읽고 있는 석훈을 볼 때마다 찬희는 항상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자신과도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같은 과 친구들이 석훈 선배에 대한 호감을 표시할 때면, 마치 자신에게 하는 충고인 듯 친구들에게 말했다.

"에헤이! 애인 있는 사람한테 관심을 가지면 쓰나!"

겉으로는 이렇게 관심 없는 척 속마음을 꼭꼭 숨기던 찬희였지만, 석훈 선배와 소연 선배가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자기가 제일 먼저 고백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헤어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보았다.
하지만 선배에게 그럴 기미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방대 국어국문과 졸업자는 취업이 힘들 거라는 얘기를 들으며 다니게 된 일본어학원에서 찬희는 진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일본어를 함께 공부하던 진우와 사귀게 되면서 석훈은 찬희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성적도 좋고, 스펙도 좋았던 석훈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해서 서울로 발령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석훈에 대한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석훈 선배를 한국도 아닌 외국의 마트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이지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은 누구랑 온 거예요?"

"응, 회사 연수로 온 거야. 집사람이랑 애들은 집에 있고."

"와이프는 그때 그분?"

"응, 김소연"

당시에도 사랑꾼이라 소문난 그였지만, 역시 마음이 변치 않았나 보았다.

그렇게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만 물은 체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길로 나뉘어 갔다.

찬희는 그 이후로 괌이라는 글자만 봐도 석훈 선배와 만났던 그때가 떠오르고는 했다. 

찬희는 전광판의 '괌'이라는 글자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생각했다.

한때는 찬희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추억 속에나 있는 석훈을 다시 만났던 그날도 신기했고, 그런 그를 보고도 예전과 같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도 신기했다.

찬희에게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뱃속에 있는 아기가 그 누구보다 소중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친 뒤 출근해야 할 직장과 앞으로 내게 닥쳐올 현실들을 잘 헤쳐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찬희는 고개를 흔들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매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빨리 매장에 가서 하나라도 더 팔아야지.'

하나라도 더 팔아야겠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진 찬희는 매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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