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그 시절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목영 Oct 21. 2024

훗날


  엄마 / 응 / 나 학교 안 갈래 / 왜 / 선생님이 내가 손을 들어도 시켜주지 않아 / 

  그건 선생님이 네가 답을 안다고 생각해서 다른 애들 시키는 거지 / 그리고 내가 한 숙제는 보지도 않아 / 

  그건 네가 숙제를 또박또박 잘하고 있으니 보지 않는 거지 전에는 선생님이 너를 예뻐한다고 했잖아 / 

  이제는 아니야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아 

     

오늘은 두 살 터울의 누나가 국민학교를 입학하는 날이다. 나는 엄마 따라 누나와 함께 지름길로 갔다. 지름길은 미군 부대 철조망을 따라 생긴 오솔길이고 오솔길 옆으로는 다듬어진 관목과 풀밭이 있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좋아 동네 사람들은 자주 이용했다. 전쟁 중이라 소규모 미군 부대는 도심 가까이에도 있었다.     

학교에 들어서니 넓은 운동장에 유리창이 많은 길고도 큰 건물이 여섯 살 아이를 압도했고 교실 앞 화단에는 이름 모르는 꽃과 나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신비로웠다.     

아이들은 각반 선생님 앞에 열을 맞춰 나란히 섰고 엄마와 나는 다른 학부형들과 함께 아이들 뒷줄에 서서 교장 선생님의 축사를 들었다. 아이들이 학생이 된다는 것과 이런 넓은 학교에 매일 다닌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부러웠다.          


  엄마 나 누나랑 학교 다닐래 누나가 없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 안 되지 나이가 아직 안돼 / 

  나는 글도 알고 셈도 할 수 있어 / 그래도 안 돼 나이가 차야 학교에 가는 거야 / 

  그래도 선생님한테 얘기해 봐 응 

         

엄마는 하도 보채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탁해 보겠다 하고 선생님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갔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면서 아이들 얼굴을 한 명씩 한 명씩 확인한 후 뒤에 있는 학부형과 차례로 면담하였다. 이윽고 엄마 차례가 되어 나와 엄마는 선생님을 마주하고 곧추앉았다. 엄마는 선생님과 수인사(修人事)를 하고 미욱한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면서 덕담을 이어갔다.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아 조바심이 났고 나는 엄마 치맛자락을 당기면서 엄마아~ 나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나의 뜻을 전달했다. 엄마는 그제서야 조심스레 선생님께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의외였다. 선생님이 장부(출석부)를 보고 아이들을 부르며 확인하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엄마에게 내 이름도 장부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너의 이름도 여기 있어하며 출석부를 펼쳐 이름을 보여주셨는데 나는 단박에 내 이름이 아닌 것을 알았다. 성은 같지만 이름이 달랐다. ‘엄마아, 이건 내 이름이 아니야’ 하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걸상에서 내려와 교실 마룻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대성통곡하였다.     

이때는 출석부에 이름을 모두 한자로 썼고 대부분 공문서도 한자였다. 재잘대던 아이들도 뒤에 남아 있는 학부형도 일순간 경직되었고 시선은 나와 선생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내 이름이 장부에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절망감에 서럽게 울었다. 당황한 선생님과 엄마는 나를 달랬고 선생님이 출석부 맨 밑에 국문으로 내 이름을 써서 보여준 뒤 내 울음은 끝이 났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안도감에 씩씩하게 집으로 왔다.     

교사 이 년 차인 신출내기 선생님은 내가 한자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 이런 사달이 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에 다녔다. 이때는 대부분 아이들이 입학해서 글을 배웠고 셈도 익혔지만 일부의 아이들은 취학 전에 집에서나 서당에서 동몽선습이나 천자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두 살 어린아이가 발표도 숙제도 곧잘 하고 나이에 비해 체격도 크고 재발라서 보건(체육) 시간에 공놀이도 달리기도 잘하니 선생님은 대견해하셨고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선생님의 관심도는 식어갔고 늘 맨 뒤에 짝 없이 혼자 앉아 있는 것에 소외감도 느꼈다. 아이들은 내가 같은 반 여자아이의 두 살 어린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나에 대한 태도도 차츰 바뀌어갔다. 나는 학교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갔고 미군 부대 철조망에 빨간 줄장미가 무더기로 질 때쯤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듬해 봄에 엄마는 강 대목과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성이 강씨고 목수 중에 우두머리라 엄마는 강대목이라고 불렀고 강 대목은 사람이 없을 때는 엄마를 마님이라고 불렀다. 시골의 먼 일가친척인 것 같았다. 이후에도 강 대목은 두 번 더 우리 집을 지었다. 지금 사는 집은 비좁았다. 쪽마루에 작은 방이 세 칸 나란히 붙어있고 조그마한 부엌과 마당이 전부였다. 이전에 살던 집의 뒷마당 정도 크기였다. 이전에 살던 동네는 조선시대 때 조성된 도로가 넓은 고색창연한 동네로 본채와 뒤채로 또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반가(班家) 동네였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본채와 뒤채가 있는 대가(大家)였다. 비좁은 이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곡절 많은 사연을 십여 년이 지난 후에 열세 살 많은 누나로부터 듣고 침통했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나는 엄마 따라 집 짓는 데를 갔고 그곳에서의 경이로운 체험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장을 포개놓은 살평상 모퉁이에 앉아 목수들의 작업에 정신이 팔려 배고픈 줄도 몰랐다. 목수들은 톱으로 나무를 켜고 끌로 나무를 뚫고 대패로 송판을 밀고 부산했다. 거친 나무를 대패로 쓱쓱 밀어 말끔히 다듬고 그 위에 먹줄을 튕겨 금을 긋고 금 따라 정교하게 톱질하여 문살을 만들고 그 문살을 문틀에 끼워 넣어 문짝을 완성하는 솜씨에 감탄했다.     

짚을 작두로 썰어 황토에 넣고 물을 붓고는 맨발로 지근지근 밟아 반죽을 만들었다. 벽 속에 수숫대를 엮어 넣고 그 위에 반죽된 흙을 발라서 초벌벽을 만들고 그 흙벽이 단단히 굳어지면 회반죽으로 덧발라서 벽을 완성하는 것도 신기했다. 이런 목수들의 일에 몰입된 나를 본 엄마는 두 번 더 데려왔다. 마지막에 왔을 때는 인부들이 우물을 파서 그 속에서 이가 잘 맞는 반듯한 돌을 차곡차곡 우물 벽을 따라 쌓아 올리며 그 돌을 딛고 올라오면서 우물은 완성되었다. 바닥에선 맑은 물이 솟구쳐 올랐고 우물 벽은 옥수수 알갱이처럼 촘촘히 돌로 박혀있어 마치 가운데가 뻥 뚫린 돌탑이 물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강 대목은 궂은일도 솔선했다. 나이가 연배인 목수들도 고분고분 강 대목의 지시를 받아 협동하여 집을 완성하는 것을 본 나는 강 대목의 지휘통솔력에 감명을 받았다. 훗날 성장해서 창업할 때도 내 가슴속에 잠자오던 강 대목의 책임감과 통솔력을 일깨워 성공했다. 협동심과 통솔력은 집 짓는 살평상에서 발아되었다고 생각되었다.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이 동네는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위쪽은 초가가 드문드문 보이는 구동네였고 아래쪽은 신흥동네로 대부분 기와집과 양옥이었다. 우리는 늦여름에 이사를 했고 이듬해 봄에 드디어 나는 새 학교에 입학했다. 가슴에 수건을 달고 입학식에 가는 아이를 보며 엄마는 흐뭇해했고 이 년 전 입학 때와는 사뭇 다른 당당하고 자격을 갖춘 학생이라 나는 행복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다섯 명이 함께 입학했는데 그중 여자아이 한 명은 나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집 동쪽으로 맑은 강이 동네를 휘감아 흐르고 앞산의 울울창창한 숲과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수묵화였다. 최적의 풍경이 전이모사(轉移模寫)된 수묵화다. 나는 고기 잡는 방법과 헤엄을 이 강에서 배웠다. 물고기도 새 이름처럼 종류가 많았고 잡는 방법도 도구도 다양했다. 강을 건너면 왼쪽으로는 나지막하고 평평한 야산이 길게 펼쳐져 있고 끝자락에는 높은 언덕에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여 대낮에도 어둡고 노고지리며 꿩과 토끼의 서식처가 되어주었다.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논이 펼쳐져 있었고 야산과 논 사이에는 웬만한 가뭄에도 끄떡없는 미루나무가 줄을 서 있는 개천이 흘렀다. 논에 물을 대는 수자원이기도 했다. 어른 손바닥만 한 바닥붕어, 송어, 꺽지 등 온갖 물고기가 많아 물 반 고기 반의 개천과 논과 야산은 아이들 일상의 터전이요 수련장이기도 했다. 여름방학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나는 아이들과 산과 들을 누볐고 언덕이나 강에서 뛰고 달렸으며 햇볕에 그을렸고 멱을 감았고 겨울에는 손이 트도록 얼음을 지쳤다.     

이 모든 것들이 보약이요 명약이다. 이때의 튼튼함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고 매사(每事)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집은 온통 산과 들과 강으로 둘러싸여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의 동화를 느끼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산색(山色)도 시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뀌듯이 자연은 순환하는 계절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면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지천에 피는 꽃들로부터는 고운 심성이, 땅에 단단히 얽혀 있는 긴 뿌리로부터는 강인한 심성이 키워졌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성장해온 인간의 큰 덕목들은 청년 시절의 역경과 가난 속에서도 바른 심성을 잃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산천경개한 이곳에서 길러진 인성과 문물의 중요성을 깨달은 지성이 나의 실체요 나의 인생이다. 이 조화로운 자연에서 아들이 범사에 감사하고 음전하게 자라도록 터를 잡은 엄마의 선견지명에 늘 감탄해하고 고마워한다.          


떠날 때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라는 시구처럼 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그래서 이승의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저승에서 하나씩 하나씩 펴면서 끝도 없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제한 없는 이 모든 혜택도 어머니께서 내게 내려준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다.    

이전 02화 한 여인의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