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주는 크나큰 즐거움에 매료되어 숙성방법과 제조기술이 늘 궁금하던 차 두 해 전에 작심하고 와인클래스를 마쳤습니다. 틈틈이 사케와 위스키 등의 발효주와 증류주도 공부하였습니다. 젊어서 익혔더라면 오묘한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 긴 여운(餘韻)을 음미하면서 양(量)과 질(質)을 함께 즐기며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명주(名酒), 명장(名匠)에게 감사도 하면서.
삼 개월의 와인 Class 상급과정은(외국와인교육기관의 한국지부) 8명의 대면 수험생과 4명의 비대면(인터넷) 수험생으로 70대가 한 명 40대가 한 명 나머지는 20~30대로서 나를 제외한 수험생들은 승진이나 취업을 목표로 하여 학업에 충실하였으며 수료하면 국제인증 소믈리에(Sommelier)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지니 모두 맹열파(猛裂波)였다.
나는 방 하나를 와인공부방으로 개조하여 벽에 칠판도 걸고 주독야독(晝讀夜讀) 하면서 답답하면 멀지 않은 구립도서관(區立圖書館)을 이용했다.
접붙이기, 묘목 관리, 토양, 재배, 병충해, 수확, 발효, 숙성, 병입(甁入) 전 과정(過程)에 나라별 브랜드별 제품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숙지해야 했었다. 수업은 이론(理論)과 실기(實技)로 나누어졌다. 실기는 각각 세잔의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을 시음(試飮)하여 포도품종, 향, 숙성도, 생산연도 등을 적어 제출하는 일종의 블라인드(無情報) 테스트라 어렵기도 했지만 감별사가 된 기분이라 즐거운 시간이었다. 수료 때쯤에는 교수로부터 스페인에 있는 와이너리(포도원)를 인수해서 직접 경영하는 제안을 심도 있게 검토하기도 했고 유학을 생각하기도 했다.
최상의 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빚어지는지 오랜 궁금증이 풀려 감격스럽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학문이다.
젊어서는 호기롭게 마시고 즐겁게 취하는 것이 술이 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청탁불문(淸濁不問) 두주불사(斗酒不辭)하여 다음 날 혼미(昏迷)하기도 했다. 고민하는 친구가 동석(同席)하면 술은 시름을 녹여주는 망우물(忘憂物)이며 선물(仙物)이니 마셔서 신선의 세계로 가자고 권주(勸酒) 하며 시름을 덜기도 했고 어여쁜 여인이 동석(同席)하면 축배의 노래 한 소절 부르며 잔을 부딪치며 환심을 사기도 했다.
중장년기에는 많은 시인 특히 이백과 이하의 장진주, 소동파의 적벽부를 읊으며 두보의 시로 분위기를 잡아 호쾌하게 마셨다. 천고(千古)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이 짧은 인생, 인생무상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술이 으뜸이라고 하면서 관심응시주(寬心應是酒),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흥얼대며 수작(酬酌)을 했다.
참 멋들어지고, 시쳇말로 폼나는 주석(酒席)이었다.
이순(耳順)이 되어서는 천천히 음미(吟味)하면서 음식이나 동석자의 주량(酒量)을 살펴서 주종(酒鍾)을 선택하였다. 소연(小宴)이라도 각인애호주(各人愛好酒)로 여백(餘白)과 기품 있는 술자리에 즐거움을 더하였으며 고희(古稀)가 되어서는 선인(先人)들의 운치 있는 음주(飮酒)에는 연속 동작이지만 순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배(擧杯-술잔을 손에 듦)-정배(停杯)-함배(銜杯-술잔을 입에 묾)-경배(傾杯- 술잔을 기울임)-건배(乾杯)의 순서다.
정배란 음주 동작의 하나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잠시 손에 멈추고 뜸을 들이는 과정의 이름이다.
이는 음주의 완곡어(婉曲語)들로서 풍아(風雅)한 은근미를 풍기는데 정배는 여유의 멋이라, 정배에서는 주석(酒席)의 온갖 정감(情感)과 풍정(風情)이 이 과정에서 고이게 마련이다. 정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함배로의 직행은 삭막하고 몰풍경(沒風景)스럽다. 그래서 나는 혼술이나 자작(自酌)할 때도 정배를 하는데 정배의 찰나(刹那)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보이기도 한다.
늘 여유 있는 주머니 사정으로 두보(杜甫)처럼 주채(酒債-술빚,외상술,酒債尋常行處有)도 전춘의(典春衣-봄옷을 저당 잡혀 술 마심)도 없었으며 때로는 금준미주두십천(金樽美酒斗十千-한 말에 만 냥 하는 술)도 마셨으니 큰 복이 아닌가.
그토록 두보가 동경했던 고희(古稀)도 지났으니.
하찮은 몸 이 밖에 더 무엇을 구하랴.
미구차외갱하구요! 미구차외갱하구요!
1) 미구차외갱하구 (微軀此外更何求 - 하찮은 몸 이 밖에 더 무엇을 구하랴) : 두보 강촌(江村)
2) 관심응시주 (寬心應是酒 - 마음 달래기는 술이 으뜸) : 두보 가석(可惜)
3) 일배일배부일배 (一杯一杯復一杯 - 한잔 또 한잔 거듭 한잔이라) : 이백 산중여인대작(山中與人對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