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선이 또 한 번 뒤듵리고 있었다. 레이몬드 백작은 익숙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테라스 위에서 비장한 표정을 지은 미샤 하를로트가 말했다.
‘백작님, 제가 바라는 것을 모르시겠어요?’
두 사람만의 은밀한 대화가 나뉜다. 둘 중 한쪽은 필시 오늘밤에 안 좋은 꼴을 면치 못하리라. 진실을 알고 있는 두 연인의 대화였다. 단지 그 이후의 전개는 이때까지와 조금 달랐다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죠’
이윽고 레이몬드 어투렛 백작의 입이 열렸다. 그늬 목소리는 낮고 차분해서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챈 듯했다.
뜻밖의 대답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아뇨, 사랑해요. 저와 함께 살아서 가요’
‘안됩니다.’
‘함께 살아요, 그게 제가 바라는 거예요’
그 장면은 실로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잘렸던 뒷이야기라도 되는 듯했다.
‘당신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샤를로트, 그들을 저버릴 수 있습니까?’
‘둘 다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가요!’
미샤 화이트의 절박한 외침에도 레이몬드 어투렛 백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운명이었죠, 사랑합니다 미샤’
그때였다 마치 모든 게 각본이라는 듯이 타이밍 좋게, 미샤 화이트에게 달려있던 와이어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폭발이 터졌다
‘레이몬드!!’
쾅-!!
무너진 잔재의 폐허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비단, 미샤 화이트만이 아니었다. 미샤 화이트가 레이몬드 어투렛 백작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실종된 후였다.
*
낯선 장소에서 깨어났을 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자제들이 집을 이루고 있었다.
“깨어났쇼?”
친근해 보이는 인상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며 수프를 내밀었다.
“......”
그러나 노인의 호의에도 사내는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단연컨대, 임을 열지 않은 것은 말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마당에 눈앞의 상대를 믿을 수었기 때문이었다.
“깡 말라가지고, 뭐라도 먹어요”
“.... 누구십니까?”
경계 어린 질문에도 노인은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 난 그저 작은 찻집을 운영하는 노인일 뿐입니다. 식기 전에 먹어요”
“잃어버린 자식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아이고 제가 괜히 나섰나 보네요”
“실례했군요”
“아닙니다. 사실인 걸요. 어릴 적 여행을 갔다. 한눈 판 사이 딸이 없어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길가에 쓰러져있던 당신을 구해 준 것도 당신이 누군가의 자식일 것이 생각 나서겠죠”
“..... 레이몬드 어투렛입니다. 혹시 이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여긴 시골 변방이라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제가 일감을 도와드릴 테니, 잠시동안만 묵게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고, 노인 많은 동네에 훤칠한 젋은이 하나 있으면 좋지요 허허”
그렇게 레이몬드 어투렛 백작은 어느 시골의 변방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노인고ㅑㅏ 함께 살았다. 그곳에 미샤 화이트가 방문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