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보따리를 꺼내기 전에 앞서, 결혼하기 전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내가 23살 때의 일이니까 자그마치 21년 전의 일이다.
나는 간호사다. 딱히 이렇다 할 뛰어난 재능이나 특기가 없던 나이다. 그저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는 성실한 아이였다. 간호학과에서 주어진 과제를 열심히 했고, 국가고시를 패스하여 간호사가 됐다. 천안에서 살 던 나는 첫 직장을 집 근처로 잡았다.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나의 실습 병원이자, 첫 병원이다. 병원에 지원서를 쓸 때 였다. 아직 학생이어서 취득한 자격증 번호 같은 것 밖에 더 이상 쓸 것이 없던 때였다. 병원 지원서의 양식 안에는 앞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을 때 원하는 부서와 원하지 않는 부서를 쓰는 칸이 있었다. 지원자에 대한 배려인 것 같다. 워낙에 대학병원에 입사할 때는 지원 부서라는 건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병원에 합격을 하면 대기를 하다가 순번대로 입사를 해서 간호사가 일을 할 수 있는 부서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부서는 1, 2, 3 순위 전부 다 신생아실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실습 병원이었던 탓에 병원 직원들과 같이 병원 생활을 겪었는데, 유독 신생아실에서의 실습 경험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특히 실습 나온 간호학생들을 지도해 주시던 박준선 선생님의 따뜻한 모습에 나도 이런 간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신생아를 대하는 태도나 실습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동료들과의 관계를 비추어 볼 때 나도 저런 간호사가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멋진 분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병원에서 항상 아픈 환자들을 보면서 일을 하면 심적으로 지치기도 할 텐데, 아기들을 보면서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단지 이런 심플한 이유로 나는 신생아실을 지원하게 되었고, 1, 2, 3 위의 지원 순위가 전부 신생아실이라는 신규간호사를 병원에서는 소아과 병동 경험을 거치게 한 후 원하는 대로 신생아실로 배정을 해 주었다. 이제부터 나는 신생아실 간호사다.
수많은 간호파트 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파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들처럼 지원 부서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배치받은 부서에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생각보다 신생아실에서의 근무는 녹록지가 않았다. 아니 많이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솔직히 귀가 너무 아팠다. 하루 종일 울어대는 수많은 신생아들의 울음소리와 하루 종일 울려대는 인공호흡기와 각종 기기들의 알람소리들. 처음 근무를 하고서 한 달 동안은 계속되는 소음으로 인한 두통으로 타이레놀을 달고 살았고, 한 달 즈음이 지나니 적응이 되었다. 근무 시간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고,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실습학생으로서 바라보던 신생아실과 내가 직접 간호사로써 일을 하는 것은 책임감과 출근하기 전의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그 당시에 내가 근무하던 신생아실은 3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정상 신생아실, 신생아 입원실, 신생아 중환자실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실습학생은 정상신생아실과 신생아 입원실만을 실습했다. 정상 신생아는 말 그대로 정상적으로 분만되어 자궁 외 생활에 적응만 잘하면 되는 아이들이었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내 자식이 아닌데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단 말인가. 신생아 입원실의 아이들은 항생제와 약간의 산소 치료 정도가 필요한 정도로 경증의 신생아 환아들이었다.
문제는 신생아 중환자실이었는데 이곳은 정말 정말 작은 아이들도 오는 곳이다. 신생아는 보통 36주에서 37주는 되어야 만삭이라고 하여 자궁 외 생활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데, 그 보다 훨씬 어린 26주 정도의 신생아부터 인큐베이터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수액치료와 위관영양들을 하며 살아간다. 너무너무 작아서 맨 손으로 만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이 아이들을 간호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였다.
인큐베이터는 대략 2천 ~ 3천만 원 정도로 고가의 의료기기인데, 이런 인큐베이터가 수십 대가 있다. 그래서 대학병원급에나 있는 인큐베이터에서 중환자실의 신생아들은 자궁 안의 환경과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케어를 받는다. 나는 퇴사하기 전까지 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게끔, 잘 생존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 하며 내게 주어진 일을 했다. 나는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신생아들이 최고의 장비가 있는, 최고의 의료진이 있는 곳에서 케어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엄청난 혜택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