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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 밖을 나온 루기 Dec 15. 2024

이토록 운전이 즐거운 곳, 제주

제주에서 운전을 즐기는 법

혹시 장거리 운전 해보셨나요?


남자분들이라면 "네"라는 대답이 대부분이겠지만, 여자분들 중에는 "아니요"라는 대답이 제법 있을 거예요.


가족여행을 가는 차에서, 제자리는 항상 운전석 옆자리였어요. 졸리면 운전대를 내게 넘기라 말해도, 남편은 본인 뺨을 때려가며 운전을 할지언정 저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죠. 제 운전실력은 딱 그 정도. 시내운전은 하지만, 자동차전용도로를 지나 운전은 두려웠어요.


그런 제 운전실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는 어째요. 운전자가 나뿐인걸. 그런데 제주에서의 운전은 너무 행복했어요. 어떻게 행복했는지 저의 추억여행길, 함께 해 시렵니까? (80년대 진행이네요)




제주도에 입도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은 비행기를 이용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배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수영,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배를 타고 싶었다. 내가 타던 익숙한 자차를 실어 갈 수 있고, 무엇보다 타고 싶은 배가 있었다. '퀸 제누비아호'라는 여객선이다. 내가 제주도살이를 갔던 2021년 당시 따끈따끈한 신상 배였고, 국내 최대 규모의 멋진 배였다. 3등실을 이용해서 가면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비행기보다 저렴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가족실 이상의 객실을 선택해야 했다.


사실 자차 적재비용 + 가족실 비용을 합치면 비행기 + 차량탁송을 이용하는 것과 가격이 비슷했다.

퀸 제누비아호 로비

타이타닉호 같지 않은가. 콩깍지가 잔뜩 씐 채로 배를 타고 가겠노라 남편에게 말했다.


목포까지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3시간의 이동시간, 승선시간 새벽 한 시, 제주 도착시간 새벽 5-6시경, 비행기+차량 탁송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비용, 이 모든 것을 고려한 집안의 가장이 말했다.


"비행기 타라." 


출도착을 함께 할 수 없는 남편의 우려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타이타닉, 아니 퀸 제누비아호여 안녕. 엉엉.

다음에 꼭 만나.



여름방학은 제주도의 성수기에 해당된다. 즉 모든 비용이 비싼 편이다. 차 렌터비 역시 그러하다. 이 시기에 열흘 이상의 일정이라면 '탁송'이 더 저렴하다.


차량 탁송을 이용하면 기사분이 우리 집 주차장에 오셔서, 차를 가져가신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제주 공항에서 내 차를 받으면 된다.

출발전 차량에 가득 실어놓은 짐들. 킥보드 2개에 캠핑 테이블, 캠핑 의자까지

익숙한 자차를 제주도에서 쓸 수 있는 점, 차 안에 미리 짐을 잔뜩 실어 놓을 수 있는 점, 그래서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찾을 필요가 없는 점, 비행기에서 내려 렌터카를 빌리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는 점 등이 아주 큰 장점이다.

실제로 나 역시 익숙한 차를 운전할 수 있어서 렌터카와는 비교할 수 없게 편했다.




자, 이제 어떤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는고 하니, 첫 번째는 바로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이다.

<같은 듯, 다른 이런 사진이 휴대폰에 오조오억 개쯤>

운전하다 몇 번을 멈추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파란 하늘이, 또 흰 뭉게구름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무지개가, 풀숲을 누비는 말들이, 이 모든 '제주의 풍경'이 나의 운전을 즐겁게 했다.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구름 아래, 은은한 무지개 보이시나요?>

두 번째의 행복 포인트는 느린 속도로 달려도 되는 한가한 도로였다.

제주도 여행길에 만난 도로의 제한 속도는 대체로 시속 60km 이하였다. 자동차 전용도로들이 시속 80km, 100km임을 감안하면 그다지 빨리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제한속도만큼도 액셀을 밟지 않았다. 편도 1차선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내 뒤를 따라오는 차는 별로 없었다. 백미러로 뒤를 보고, 따라오는 차가 있으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 버튼을 눌러 준다. 두 눈을 깜빡이는 내 차를 뒤로 하고, 급한 차들은 나를 앞질러 간다. 나는 급할 것이 하나도 없는 여행자였기에, 차 안에서 천천히 제주를 만끽했다.


이런 나의 행복한 순간들은 아이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리하여, 세 번째는 아이들과 차 안에서 함께 놀이하며 보낸 시간이다.

차만 타면

"언제 도착해 엄마?"

 "얼마 남았어 엄마?"를 외치던 딸들. 운전도 해야 하는데 아이의 징징거림에 영혼까지 털려가며 운전대를 잡을 순 없다. 이동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내가 했던 몇 가지를 떠올려 볼까? 


말 많은 아이 둘과, 기분 좋게 이동 시간을 보내는 법

아이가 직접 고른 음악을 듣는다.

제주 여행 준비물 중에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도 음표가 덧 입혀지면, 그 순간은 유난히도 특별해진다. 음악과 함께 하는 여행은 오죽할까. 딸아이 둘에, 나까지 셋이서 돌아가며 사이좋게 한곡씩 골랐다. 고심 끝에 각자 하나씩 고른 취향이 자그마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풍성하게 퍼져 나온다.

운전하며 음악도 틀어야 했기에 차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바로 "하이, 빅스비"


하이 빅스비, 유튜브에서 성시경의 제주도 푸른 밤 틀어줘

아이들은 자신이 고른 곡목이 나오는 동안, 음악을 즐기느라 즐겁다. 고를 수 있는 순서를 기다릴 때는, 자신의 다음 곡을 고르느라 또 즐겁다. 우리는 그때 당시 유행했던 유튜브 콘텐츠 중 하나인 '킬링보이스'도 자주 들었다. 아이유의 경쾌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잔나비의 설레는 목소리가 제주의 풍경에 버물어져 마음을 간질인다. 10cm의 몽환적인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어느새 합창을 하고 있다.


구름이 무슨 모양일까?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다 보면, 제주의 맑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보인다. 둘째가 외친다.

"엄마 저거 봐바. 용이 불 뿜고 있는 것 같아."

첫째가 얘기한다.

"어디가 용이지? 내 눈에는 날개 달린 기린이 보이는데?"


"어! 얘들아 저기 완전 달팽이처럼 생긴 구름이 있어."

"어디, 어디? 우와 진짜네."

보자, 이 구름은 연기 뿜는 증기기관차쯤 되려나

우리가 특별히 이름난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한 게 아니다.

그저 관광지로 향하는 길에서, 식당을 가던 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보고 각자가 느낀 구름을 말했다.


끝말잇기

제주도-도장-장난감-감나무-무술-술래잡기-기차-차표-표인봉

어, 사람이름은 금지인데 내가 걸려버렸다. 아직 어휘가 부족한 둘째에게 슬쩍슬쩍 힌트를 주는 내게, 첫째가 불만을 내뱉는다.

"아, 엄마 가르쳐주지 마라고."

아니 아니 엄마가 알려주려던 게 아니고, 그냥 혼잣말이 나온 거.


그림 그리기

차에는 항상 종이와 색연필, 사인펜 등이 실려 있다. 아이들은 이것도 저것도 지루하면 그림을 그린다. 서로 그린 그림을 보며 웃기도 하고, 얘기도 하며.


많이 걷게 된 관광지를 다녀온 후에는, 새근새근 곤히 자는 아이들을 룸 미러로 보게 된다. 나의 입꼬리는 나도 모르게 스윽 올라간다.


이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잔잔하게 들으며, 운전을 즐기면 된다. 마음에 드는 커피숍이 있으면 잠시 들러 커피를 사 오기도 하고, 눈길을 빼앗는 해안가에 잠시 차를 대고 윤슬을 바라보기도 한다.

'일단 멈춤'이라고 말하는 풍경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여전히 꺾인 고개로 눈을 감고 있다면, 저절로 깰 때까지 기다린다. 운전하느라 밀린 연락에 답하기도 하고, 가계부도 적어가며.


제주의 운전은 참 좋았다.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좋았고, 창밖에 펼쳐진 그림들이 이뻐서 좋았다.

구름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하늘

네비를 잘못 봐서 길을 잘못 들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골길 어디든 차 한 대 돌릴 공간만 있으면 휘익 돌아 맞는 길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네비 속 아가씨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지만.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 탐색 중입니다."

경로를 이탈하다 이런 곳을 만나면 그저 러키빅키

차에 초보운전 딱지가 붙어 있으신가요? 제주 공항을 오갈 때 이용하는 도로는 자동차전용도로라서, 그때만 바짝 긴장해서 운전하면, 나머지 도로는 크게 어렵지 않아요.  제주도 운전, 도전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초중등쯤이었던 것 같다.  
한반도로 치면 아래쪽 동네에 사는 우리 가족이 큰마음먹고 38선 근처 통일전망대를 향해 간 적이 있다.  30년쯤 전이니, 도로 사정이 지금보다  별로였다. 시간이 엄청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지겹다, 연신 언제 도착하냐며 묻는 나에게 아빠는 놀이를 제안하셨다.  

오빠와 내가 1부터 9까지 숫자 중 하나를 고른다. 중앙선 너머 반대편을 지나는 차의 번호판을 확인한다. 내가 고른 번호가 차넘버의 끝번호이면 이기는 게임. 지금처럼 차가 많던 시절이 아니었다. 연달아 두 세대가 지나기도 하고, 오지 않는 차를 목 빼고 기다리기도 했다. 차 한대당 10원? 100원쯤 걸었으려나. 슝 지나가는 차의 번호판을 보기 위해 뛰어난 동체시력이 필요하다. 온 가족이 와글와글 본 번호를 주장한다. 서로가 말하는 번호가 다를 때는 차 안의 분위기가 잠시 뜨거워지기도 한다.
나의 뇌 장기기억 코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추억 속의 아버지는 유재석, 강호동이었다. 게임을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는 사회자이자 중재자. 나의 아이들에게도 이런 기억을 주고 싶었다.

대학생 때, 38일간의 유럽 일주 배낭여행을 갔을 때이다. 카세트와 이어폰, 그때 유행하던 광고음악 모음집 테이프를 챙겨 갔다. 그때의  사진, 그때의 선율이 합쳐진 순간은, 그게 언제이든 나를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데려다준다. 여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음악의 힘을 알았기에, 아이들에게도 그런 음악의 추억을 주고 싶었다. 지금도 우리는 제주에서 들은 노래를 가끔 들으며, 제주의 하늘을 떠올린다.




제주의 붉은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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