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살았던 김포 우리 집은 논밭 뷰였다. (물론 지금은 지하철역이 들어선 이후로 천지개벽하긴 했지만.) 김포에서 놀만한 곳이라 하면 ‘읍내’로 불리는 구도심과 사우동 학원가가 전부였기에 문화생활을 즐기기엔 역부족했다. 그래서 집순이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생활 쿨타임*이 차면 서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60번이나 1002번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5호선 송정역에 도착한다. 30분 지하철을 더 타고 내리는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다. 역마살이 있는 건지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아빠 덕분에 혼자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는 법을 일찍 배웠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서도 지하철을 타고 멀리 나갔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냄새도 맡고 좋아하는 음반과 디자인문구를 잔뜩 구경하고 오면 기분이 좋았다.
더 멀리 나갈 때도 있다. 역사와 미술에 관심이 많아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박물관과 미술관은 다 다녀봤다. 지금이야 서울 나갔다 오는 게 매우 기 빨리는 일이지만 그 당시 어린이의 기운은 지치지 않는 호랑이 기운이었으리라.
옷을 살 때는 동대문 두타, 헬로 apm까지 갔다.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옷을 입는지, 요즘 유행은 무엇인지 절대 김포에만 있어서는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가끔 서울이 아닌 곳을 갈 때도 있었다. 그 당시 새로 생긴 김포대교는 일산으로 가는 길을 새로이 열어주었다. 어릴 적 있었던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일산 뉴코아백화점이나 롯데백화점에 갔다. 친구들과 놀 곳이 필요하면 호수공원, 라페스타, 웨스턴 돔을 돌았다.
대학생 때는 수업이 끝난 후 영등포 타임스퀘어, 신도림 디큐브시티를 둘러보는 게 낙이었다. 복합쇼핑몰은 나에게 단순히 쇼핑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고립된 집을 벗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트렌드가 어떻게 바뀌는 중인지, 사람들의 인문환경은 어떤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이것을 나는 ‘문명 체험’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난 친구들은 오히려 자기 동네밖에 잘 모르는 ‘서울 촌놈’인 경우를 많이 봤다. 이미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에 살아서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을 테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던 경기도민은, 자의 반 타의 반 문명체험을 통해 서울 지하철 도장 깨기를 하게 되었다.
주기가 굉장히 길어지긴 했지만 지금도 쿨타임이 차면 ‘문명 체험’을 하러 서울에 나가곤 한다. 기운이 넘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서울에 나가는 게 귀찮고 기운이 빨리는 일이 되어버렸어도 서울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을 접하고 나면 삶에 자극이 된다. 힘들게 집에 오고 나면 지쳐서 늘 생각한다. ‘이렇게 멀리 나가지 않고도 경기도에서 문명체험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수도권의 팽창으로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하나 완전히 서울을 대체하기엔 너무 먼 일이며 또 대체가 될지도 의문이다.
*쿨타임 : 주로 온라인 게임에서 기술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말하나, 무언가를 자제하다가 실행할 할 적절한 타이밍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