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미정이 집이 먼 까닭에 회사에서 적극 권장하는 사내동호회 활동을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 역시 한 학년 40명 되지 않는 소수 학과에, 인맥이 중요하다는 예체능계열임에도 대학 생활 내내 동아리나 대외 활동을 감히(?) 엄두 내기가 어려웠다. 수업이 어쩌다 일찍 끝나는 날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6시에 끝나면 집에 가서 어떻게든 저녁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집으로 향했다. 까딱하면 8시가 넘기에 적당한 끼니 시간을 놓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학과회식과 야작은 피할 수 없었다. 예체능 특유의 군기 잡힌 분위기는 나를 일찍 집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교수님과 함께하는 회식이라면 더더욱 어쩔 수 없다. N차까지 이어지면 어느새 밤 10시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막차 타야 되는데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도 별 수 없다. 나는 집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하철역에서 버스가 끊기면 나는 김포공항역이나 계양역에 고립되고 말 거다. 집까지는 12km. 보도블록도 없는 교외 논밭을 걸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거니와 한밤중에 살해되어 뉴스에 나오기 딱 좋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싸’로 통하게 되었다. 다들 술 마시고 동틀 때 집에 들어가는 낭만을 즐기는데 내가 그렇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하겠다. 가끔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말에 서울에 사는 사람끼리 모였어’ 란 말이 나온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불러주지…’ 그럼 돌아오는 그들의 대답은 뻔할 것이다. ‘언니는 어차피 멀어서 못 오잖아.’
실습비도 한 학기에 nn만원이나 납부해 가면서도 나는 실습실에서 야작을 자주 하지 못했다. ‘다들 어떻게 친해져 있지?‘ 싶으면 같이 야작하면서 저녁도 먹고 한밤중에 치킨도 시켜먹은 사람들이었다.
점점 사람들에게 배제되어버린 내 모습에 주눅 들어 갔다. 지금이야 활발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20대 초중반까지 나는 무척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어차피 그 성격이면 집이 가까워도 아싸였을 것 같다. 그래서 집이 멀다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아싸가 될 만한 합당한 사유로써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격적인 결함이 첫 번째 이유로 꼽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학생활에서 낭만을 즐기지 못했던 삶에 대해서는 자조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열등감으로 이어졌다.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서울에 살았더라면, 나는 달라졌을까?’ 이런 가정을 한(恨)처럼 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