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낮은 친구가 더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어요.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를 평가할 때 ‘이건 좀 멋진데’, 혹은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대화 자리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오늘은 좀 잘했어.”
반면, 모임에서 주책없이 말을 많이 한 날은 여지없이 후회가 밀려옵니다.
“오늘은 말을 너무 많이 했네.”
그런데도 내 이야기에 반짝이는 눈으로 귀 기울여주는 친구들을 만나는 날엔, 그동안 꽁꽁 잠가두었던 수도꼭지가 한꺼번에 터져버립니다. 앞뒤 안 가리고 떠들어대는 저를 보며 친구들은 웃어줍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그리고는 다짐합니다.
‘다음엔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이렇게 나이 듦을 조금씩 감사하게 받아들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아직 멀었구나’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제 곧 고3 교실에는 수시 지원 결과가 속속 전해질 것입니다. 합격과 불합격,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교실 속에서 아이들은 생애 첫 ‘현실의 분기점’을 직접 마주하게 되겠지요. 친한 친구라 해도 수시파, 정시파로 나뉘고, 누군가는 예상 밖의 합격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며, 또 누군가는 6 광탈로 깊은 슬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어른들 눈엔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겐 인생 첫 번째의 크고 아픈 경험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낮은 성적의 친구가 더 좋은 대학에 붙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서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어른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아직 멀었구나'라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지인의 기쁜 소식 앞에서 괜히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음 한쪽에선 나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나 후회의 감정으로 마음이 힘들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아직 멀었구나.’
하지만 나이가 들어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그런 감정들이 인간이기에 자연스럽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감정을 조금 더 현명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아홉 살의 나이에 느끼는 질투나 서운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진동일 뿐입니다.
또 한 가지, 친구의 성장이나 합격을 나의 실패나 퇴보로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질투는 결국 ‘비교’에서 시작되고, 그 비교의 뿌리는 ‘나의 불안한 미래’에 있습니다. 아직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한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마냥 축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친구나 동료의 기쁜 소식에 즉각적인 축하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책망하지 마세요. 또 동료의 성공을 나의 실패로 연결짓지도 마세요. 질투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감정입니다. 다만, 그 감정이 머무는 자리를 부끄러움이 아닌 성찰의 자리로 바꿔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고3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질투, 박탈감, 억울함, 후회—모두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야.
누군가의 합격에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다들 그래.
단지 어른이 되면 그 감정을 조금 더 조용히 삼키는 법을 배울 뿐이야.
그러니 친구의 합격 소식에 마음 깊은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
그리고 조금씩 배워 나가자. 타인의 행복과 나의 불행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질투의 감정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을 터득해 보자.
그리고 그 질투는 다스리는 방법도 말이야.
이러한 마음의 동요를 포함한 모든 과정이
어쩌면, 19살에서 앞자리가 2로 바뀌며 좀 더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