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제목 ㅣ『사랑의 이해』
저자 ㅣ에히리 프롬
분야 ㅣ 에세이/심리학
P35. 심지어 감정조차도 지시받고 있다. 쾌활함, 믿음직함, 모든 사람과 마찰 없이 지내는 능력까지도. 오락도 그리 격렬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이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 슬로건도 그들에게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 연속물, 카드놀이, 사교 파티 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인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P126.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P126.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P127.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내가 정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삶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것에 대해 고민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빼앗아간다.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그 마음이 죽어가고 있다. 사랑이 부족하다. 진정으로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의 가치는 바닥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한 말들을 듣다 보면 자신이 깊게 고민한 결론이 아님에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정말 사랑이구나, 이거 정말 행복한 삶이구나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삶이 된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자꾸만 잊는다. 내가 한 번 산다는 것을.
P158-159.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기계에 대해 좋은 것은 인간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논리는 이렇게 계속된다.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P227.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환산되고, 아름다움도 ‘돈’으로 환산되고, 정의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 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give and take가 당연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떤 이와 나눈 말이 마음에 꼭 박혀 며칠간 그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사람은 인간도 나이가 들면 매력을 잃게 된다며 상품으로써 인간을 다루는 말을 했었다. 그럴까? 그게 정말 사랑일까? 현실이 아팠다. 프롬도 나와 같은 지점을 고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우리의 궁극적 결핍을 채우지만 사회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고받는 것이 당연하고 이유 없이 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혹은 경제적이든 최고의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처럼 여겨진다. (마음만 있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즉,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제대로 배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사회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값없이 받은,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이야기로 흘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P42.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써는 결코 나타낼 수 없다.
P66.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사랑은 강제된 결과로 절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인상에 남는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사랑은 자연스레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아이(‘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받았기에 사랑을 주지만 성숙한 사랑은 참으로 주는 것이다. 받을 것을 생각하며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주는 기쁨을 알고 주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을 일으킨다는 것이 놀라웠다.
미소를 짓게 되는 문장이었다.
한 문장을 간직할 수 있다면 내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다.
P159. 우리는 말하자면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많은 일들 - 때로는 일견관계없는 듯한 일들 - 을 배워야 한다. 목공 기술을 배우는 자는 나무를 깎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자는 음계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말은,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궁금하다! 성숙한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을 제대로 알았다면 아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전체를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P161. 정신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P162. 바로 이 순간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만일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P164. 그들은 정신을 집중하고 듣는다면 더욱 피곤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어떤 활동이든, 만일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행한다면, 우리를 더욱 각성시키지만(비록 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우리를 졸리게 만든다. 그런데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활동은 그날 밤 잠들기 어렵게 만든다.
종종 우리는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저기 멀리 가 있는 경험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 아닌 혼자일 때에도 건강하게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대화에서 정신집중해서 듣는다면 내가 더 피로하리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고 돌아온 날이면 지금처럼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의 바다에서 허덕이곤 했다.
그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신기하게도 우리는 분명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 역시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사랑의 언어로 대하고 싶다.
- 좋은 문장들을 발견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