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인 옥토버페스트 방문기

맥주는 한잔 밖에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by 이현

“소주, 맥주? 소맥?”

주종이 무언가 물으신다면 서른둘의 나는 단연코 소주파였다.

인체와 알코올에 대한 과학적 연관은 아는 바가 전혀 없으나, 나는 맥주가 몸에서 잘 안 받는 편이었다. 그에 반에 소주는 홀짝, 홀짝 잘 마셨다. 몰타에서 다양한 맥주와 와인을 일 년 동안 경험하고 돌아온 지금은 딱히 가리는 주종은 없으나 기분에 따라 찾는 주종은 있다. 정확히는 지향하는 기분에 따라 찾는 주종이 다르다.

이건 매우 개인적인 견해인데, 술의 도수와 취기가 올랐을 때의 기분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도수가 낮은 맥주를 마시면 취기가 오르면서 점점 흥이 나고 술자리의 분위기도 가볍게 이어진다. 반면 다소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마시면 취하면서 기분도 차분해지고 사람들과도 다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듯하다.

나는 그 중간쯤인 소주가 딱 좋았다. 가벼움과 진중함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원하는 분위기로 넘어갈 수 있는 듯했다. 네가 승진했을 때도 홀짝, 회사 팀장은 왜 그 모양인지를 토로하면서 홀짝, 오늘은 별일 없지만 안주가 맛있으니 홀짝. 그 작은 소주잔의 그립감은 왜 이리도 좋은지. 소주 광고 포스터의 여배우들에 빙의해 소주를 몇 모금에 나눠서 홀짝이다 보면, 소주가 우리나라의 대중적인 술이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더랬다.

몰타에는 당연히 소주가 없다. 아시안 마트에 가면 한국에서의 2~3배 가격일지라도 소주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몰타에서는 소주를 홀짝이며 함께 삼켜내야 할 묵직한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몰타에 있는 동안은 소주를 잊고 지내지 않았나 싶다. 대신 현지 마트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와인을 탐구했다. 이 와인들이 물 건너 한국까지 오면 몰타의 소주처럼 2~3배의 가격이 될 테니까. 아무튼 몰타에서는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생 공부를 하고 있었더랬다.


맥주 마시는 사자

옥토버페스트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극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나는 맥주파도 아니었거니와, 이유는 모르겠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옥토버페스트를 가 볼 수 있을지 몰라.’라는 막연한 아쉬움이 옥토버페스트를 일주일 앞두고 비행기표를 끊게 만들었다.

사람마다 이유는 제각각이겠으나, 어쨌든 축제는 항상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나는 사람들의 환한 표정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밝은 분위기를 좋아한다. 오늘 이곳에서 얻을 어떤 즐거움에 대한 기대, 그 즐거움을 찾고자 축제를 누비게 하는 탐구심, 축제 안에서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 이런 감정들이 사람들의 얼굴마다 작은 불꽃놀이처럼 팡팡 터진다.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시너지와 그 분위기가 축제를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에 편승하여 슬쩍 콩고물을 주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옥토버페스트의 작은 맥주 가게

옥토버페스트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다. 축제의 맥주 텐트가 대략 1만 5천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던데, 내가 축제에 도착했을 땐 그 많은 맥주 텐트들이 이미 인산인해였다.(텐트라고는 하지만 대형 맥주 텐트는 그 크기가 실내운동장은 연상시킬 정도였다.) 통행로에서 텐트 안으로 발을 들일까 말까 고민하며 기웃거릴 때마다, 전통옷을 입고 삼삼오오 춤을 추는 사람들과 열심히 맥주를 벌컥이는 사람들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심지어 맥주를 주문하는 곳이 어딘지 조차 찾기 어려웠다. 이 커다란 맥주 축제에서 맥주 한 모금 못 마셔보고 집에 가나 싶었다.

수많은 대형 텐트를 지나쳐 제법 오래 헤매었을 즈음, 나는 드디어 작은 맥주 가게에서 파울라너 500cc를 주문할 수 있었다. 빈 테이블은 당연히 없었고, 스탠딩 테이블의 반쪽이 비어있어(나머지 반쪽에는 맥주잔 두어 개가 놓여있었다.) 얼른 그 자리를 차지했다. 30분 이상을 사람들에 치여 헤매고 나니, 눈인사 한 번으로 테이블 합석을 할 뻔뻔함이 자연스레 나왔다.

맥주는 꿀맛이었다. 맥주 몇 모금을 연달아 벌컥였다. 빈자리를 찾아다니며 인파에 치이는 동안 은근히 쌓인 짜증, 맥주 축제에서 맥주 맛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이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꿀꺽꿀꺽 넘어갔다. 맥주를 1/3 정도 마시고 나서야, 모든 감정들을 삼키고 후련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어 보일 수 있었다.(위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 젊은이 셋이 손등에 하얀 가루를 올리고 킁킁거리는 모습을 본 것이.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그 젊은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저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혹은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감흥이 없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위험 레이더가 작동하여 불안감을 느낀 이상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싶었다. 남은 맥주를 허겁지겁 비우고 재빨리 가게를 나왔다.

잠시 후엔 화장실이 문제였다. 사람들이 마신 그 많은 맥주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화장실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축제 직원으로 보이는 몇에게 묻고 물어 겨우 화장실에 도착했을 땐,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러한 이슈들로 인하여 더 이상의 맥주는 사양이었다.


옥토버페스트의 놀이공원

다행히도 옥토버페스트에는 맥주 외에 다른 축제의 장이 있었다. 바로 소규모 놀이공원이었다. 맥주 텐트에는 젊은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면, 여기에는 가족 방문객이 더 많았다. 어린아이부터 청소년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나는 그 사이에 어른으로서 당당히 놀이기구에만 10만원을 지출하고 왔다. 옥토버페스트를 나서며 나조차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맥주 축제에서 맥주는 고작 한 잔 마셨으면서, 놀이기구에는 10만원이 넘게 쓰다니.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돌아간다면 20만원을 지출할 생각이다.

놀이기구의 토큰들

자유이용권 따위는 없고, 놀이기구마다 매표소에서 토큰을 산 후 입구에서 검표원에게 토큰을 제출하고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놀이기구들은 우리나라 9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라 말씀드리면 조금 더 상상하기 좋으실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게 끝이야?'싶은 시시한 놀이기구부터 자이로드롭 같은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까지 어느 것 하나 즐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 한 놀이기구라도 묘한 독일스러움이 묻어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특정 주제를 가진 테마 어트렉션이 많았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놀이공원에 가는 필자이지만, 자이로드롭은 옥토버페스트에서 처음 타봤다. 자이로드롭이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옆자리에서 F욕을 하던 학생들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내가 이걸 왜 탔을까. 제발 나를 얌전히 지상에 내려주세요.


옥수수가게

신나게 놀다 보니 허기가 졌으나, 이 동네엔 맥주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화장실만큼이나 제대로 된 음식점을 찾기가 어려웠다.(내가 못 찾은 것일 확률이 높지만...) 배고픔에 헤매다 옥수수 가게를 발견했다. 사실 필자는 위가 좋지 않다. 자주 체해서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은 피하는 편이고 그 중 하나가 옥수수이다. 하지만 허기 앞에서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겠나. 냅다 달려가 옥수수를 하나 샀다.

옥수수는 나무젓가락에 하나가 통째로 꽂혀, 버터와 치즈 조합으로 한 번 더 코팅이 되어 있었다. 기대 없이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었던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가게 옆 벤치에 앉아 허겁지겁 옥수수를 먹었다. 우리나라 찰옥수수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옥수수가 계속 생각이 나서 유럽 옥수수와 비슷하다는 초당옥수수도 구매를 해보았었지만, 그것과도 또 다른 맛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옥수수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있는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네가 옥수수 먹는 모습을 보고 나도 샀어. 이거 진짜 맛있네."

라며 엄지를 치켜들어주고는 옥수수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나.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들켰다는 생각에 다소 쑥스럽고 민망했지만, 내가 이 축제에서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나누는 폭죽이었다는 생각이 드니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다.


님펜부르크 궁전 산책로

그 후로 몇 잔을 더 마셨던가, 혹은 숙소로 가는 길에 캔맥주를 더 사갔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다음날 방문했던 님펜부르크 궁전의 산책로에서 숙취에 더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더랬다. '맞아, 나는 맥주에 약했었지.' 이상하리만치 맥주를 마시면 숙취가 심했다. 소주는 그렇지 않았는데.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칩니다."라지만 여전히 콧방귀로 흘려듣는 이 문구. 우리나라는 알코올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이 조금 더 필요함을 충분히 알고 있는 필자이다.

알코올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날 하루를 담는 그릇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소주는 나에게 익숙함과 위로를, 옥토버페스트에서의 맥주는 낯설지만 설레는 들뜸을 주었다. 몰타의 와인과 함께하는 인생 공부도 그랬지만, 옥토버페스트의 맥주도 결국 어떤 풍경, 어떤 사람들, 어떤 순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숙취로 무거워진 머리를 부여잡고 님펜부르크 궁전의 산책로에 주저앉아 있던 그 아침. 술이 주는 어떤 것은 결국 함께한 시간과 공간의 온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도 외면하는 것을 다시 한번 짚어드리자면, 과음한 다음 날 숙취만큼 확실한 결과물은 없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은 과도한 음주가 건강에 해로움을 꼭 인지하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란다.


여담

훗날 포르투갈의 어느 와인 브루어리에 갔었다. 와인의 제조 공정에 대한 설명을 지겹도록 듣고 드디어 와인 시음을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에는 어느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는 다정스레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한국이요."

"우린 독일에서 봤어."

나는 문득 옥토버페스트가 생각나 반갑게 말했다.

"아, 저 올해 옥토버페스트에 갔었어요!"

부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옥토버페스트의 맥주를 마셨니? 그건 독일 맥주가 아냐. 거기 맥주는 진짜..."

부부는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맥주맛을 잘 몰랐던 나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지만, 독일인이 얼마나 맥주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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