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몰타 한 바퀴 [2편]

by 이현

스텔라를 만난 지 2주쯤 지났을 때, 나는 걸어서 몰타를 한 바퀴 돌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몰타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을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어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번번이 포기하게 되었었다. 꿩 대신 닭이었다.

'산티아고를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마음이면, 내가 걷는 이 길이 곧 순례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19년 4월 19일의 일기
걸어서 몰타 한 바퀴
내가 걷는 이 길이 곧 카미노가 될 수 있길.

몰타 한 바퀴 계획표

‘걸어서 몰타 한 바퀴’의 계획은 단순했다. 3박 4일 동안 몰타섬 외곽을 따라 걸어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

몰타의 크기가 궁금하실 것이다. 몰타섬은 주변의 섬을 제외하면 제주도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강화도가 몰타섬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라고 하면 짐작이 되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3박 4일 동안 한 바퀴를 도는 것이 무리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계획에 거창한 목적이나 원하는 바도 없었다. 그저 현재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이길 바랐다.

스텔라가 했던 말이 도움이 되었다. 이 배낭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니 최소한의 것들만 넣으려 했다. 그럼에도 가방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무게의 것들이 정말 나에게 온전히 다 필요한 것들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얼마나 덜어낼 수 있을까.’


걸어서 몰타 속으로

“어디에서부터 걷기 시작할까?“

1년짜리 몰타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거주하는 지역인 스위기와 어학원이 있는 수도 발레타, 주요 관광지를 벗어나 본적이 거의 없었다. RPG 게임을 하다 보면 맞닥뜨리는 ‘지도의 끝’이 있다. 나의 게임 캐릭터가 게임 내 지도의 가장자리에 도착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면, 지금 푹 빠져있는 이 게임이 현실이 아님을 순간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 게임 지도의 가장자리 같은 장소가 있었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 가장자리의 문을 열고 나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몰타 한 바퀴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내 지도의 가장자리였던 바닷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해변이 아니라 조용한 바다가 보고 싶을 땐 항상 여기로 왔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아스팔트 길이 나름 이 동네 주민들에게는 산책로였다. 아스팔트 길 옆으로 벗어나 돌무더기를 휘청이며 밟아 걷다 보면 갯바위의 바다가 나온다. 나는 그 갯바위에 털썩 앉아 소용돌이치는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한없이 보곤 했다. 그러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더랬다. 여기가 내 ‘지도의 끝‘이었다. 어쩐지 여기를 벗어나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항상 집으로 발길을 옮겼었다.

나는 여기에서 시작해 내가 생각하는 ‘위’를 향하며 몰타를 반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걸어서 몰타 한 바퀴' 프로젝트였지만, 걷는 일에만 집중해서 열을 올리진 않았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고 시간을 쏟기도 했다. 바다가 예쁠 땐 무작정 바닷가에 털썩 주저앉아 간식을 까먹으며 하염없이 바다를 보다가 비눗방울을 불기도 했고, 뜬금없이 망아지 인형을 모델로 멋진 사진을 찍겠노라 한참을 낑낑대기도 했다.

'계획만큼 걷지 못하면 그냥 우버 타고 집에 와버리지 뭐.'


걷는 동안은 대부분 이런 흙길이었다.

'저런 황무지 길에 볼 게 뭐가 있나.' 싶으실 수도 있지만, 나는 꽃무더기만 보아도 걷기를 멈추고 한눈을 팔기 일쑤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산지가 없는 몰타섬은 그저 앞만 보고 걸어도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지도를 보며 지도길을 따라 걷지도 않았다. 이 길로 가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하는 생각이었다.(그리고 다른 갈림길이 딱히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산길인지 들길인지 모를 흙길을 한참 걷다 보면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곤 했다.

과하게 대책 없는 무계획 걷기인 듯 느껴지시겠지만, 큰 걱정이 들지 않았을 정도로 몰타섬은 작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길어봤자 한두시간만 걸으면 또 다른 마을이 나왔다. 아무튼 마을이 보일 때마다 느꼈던 반가운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으면 이런 기분일까.

마을로 들어서면 그제야 지도 어플을 켜고 근처 마켓을 검색해 간식거리나 물을 구매해 보충하기도 하고, 식당을 찾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청보리밭과 마을입구

청보리밭 들판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고, 마을을 지나 다시 황야로 들어서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걸으며 생각이 시작되고, 고민이 깊어지면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음에 가득 찬 한 가지 생각은 어느덧 생각 그 자체만으로 마음의 집착이 되어 끊임없이 엉겨 붙었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사념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를 기대하며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겨우 하나를 떼어 내면 또 다른 생각이 밀려들어와 다시 걷고 멈추기의 반복이었다.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까지. 어제의 사소한 고민부터 아주 오래 묵혀 둔 고질병 같은 고민까지. 3박 4일은 제법 길었고 다양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나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과하다는 거야.'

'세상 어느 것 하나 멈춰있는 것이 없는데, 왜 나만 항상 제자리일까.'

'독서가 취미이고 클림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왜 쑥스러울까.'

'지난주에 한국으로 돌아간 룸메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과하게 다른 사람들을 신경써주지 않아도 돼. 사람들은 오히려 그 친절이 더 불편할 수도 있어.'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졌으면 좋겠어. 성당 연수가 끝난 직 후, 세상 모든 것이 반짝이는 듯 보였을 때처럼.'

'여행자의 기운이라는 게 있는 걸까. 어째서 다들 나에게 친절한 걸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3박 4일을 걸었으나 결론 지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생각을 던져버린 방향으로 수많은 나침반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앞으로 뒤로. 동으로 서로. 위로 아래로. 하늘로 땅속으로.

만약 산티아고였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당연하게도 그럴 리 없다. 몰타의 흙길이든 산티아고 순례길이든 모로 누운 침대 끄트머리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고민하고 결론짓고 끝끝내 그것을 마음에서 털어내는 일은, 내 몸뚱이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에 있던 생각이나 고민들은 점점 잊혔다. 현실에서 도피하여 몰타에 있는동안 어느정도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잊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만 멈춰있다는 피해망상은 정말로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움트었고,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지나가고 잊혀지고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오춘기인지 육춘기인지 모를 어느 시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몰타를 걷는 3박 4일 동안 하느님을 만났는지, 혹은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는지를 물으신다면 그것 또한 답을 드릴 수가 없다. 그저 몰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비가 내려 발길을 막은 적이 없고, 햇볕이 너무 뜨겁지 않았으며, 항상 바람이 선선했던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Ghajn Tuffieha Bay(가인 투피헤아 베이)
Ghajn Tuffieha Bay(가인 투피헤아 베이) 해변과 경고 표지판

3박 4일의 일정 중 둘째 날에 굉장한 고비가 있었다. 지금은 사실 이 때로부터 5~6년 정도가 흘러 대부분의 것들은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 이 날의 가인 투피헤아 해변만큼은 기억이 생생하다.

걷고 걷다 보니 아주 예쁜 해변에 도착했더랬다. 당장이라도 걸치고 있는 것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모래사장에 드러눕거나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수영복 등 준비된 바가 없어 지나가기로 했다. 일광욕과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며, 남들 다 쉬는 휴일에 나 혼자 일하고 있는 듯한 박탈감 마저 들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꼭 여기에 다시 와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어쩐 일인지 저 해변에 다시 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세 번째 사진의 빨간색 화살표 방향으로 올라갔다. 대단한 계획은 없었고, 올라가면 또 여느때처럼 다른 길이 나오겠거니 생각했다. 멀리서 볼 때는 별로 높아보이지 않았는데 제법 낑낑대며 올라갔더랬다.

열심히 올라갔더니 웬걸. 왼쪽의 사진과 같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보였다. 말이 좋아 내리막이지 체감상으로는 거의 절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간 적이 있는 듯, 발길이 만들어낸 길의 흔적이 있었다.(오른쪽 사진을 참고하면 좋으실 것 같다.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해 둔 저 내리막길이 왼쪽 사진의 내리막길이다.)

'와, 여기를 어떻게 내려가지?'

나는 뒤를 돌아 걸어온 해변을 보았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하루치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괜찮은 길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소공포증도 살짝 가지고 있었던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저 길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 중간에 서너 번을 멈춰 섰다. 반쯤은 미끄러지고 반쯤은 뒤로 기다시피 해 겨우 내려갔다.

여행을 여러 번 다녀보며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 중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다. 어떤 여행보다도 기억에 남는 여행은 아주 고생스러웠던 여행이라는 것이다. 해변에서 언덕을 넘어 해안가를 걷고 다시 꾸역꾸역 언덕을 올라와 왔던 길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기까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었는지. 5~6년이 지난 지금도 저 장소에 대한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소소한 즐거움들

'몰타 한 바퀴'를 하며 볼 수 있는 자연의 풍경도 좋았지만, 이런 소소한 마주침들도 좋았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고슴도치를 밟지 말아 달라는 표지판, 유머러스한 커피 광고판, 낮은 담장 안에서 쉬고 있는 말, 대문간에 대충 시멘트를 바른 장식에서 느끼는 따스함 등.

몰타 일년살이를 하며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다 가 보았었다. 하지만 몰타 한 바퀴를 하며 마주한 이런 소소한 것들이 몰타 사람들의 생활하는 진짜 모습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값진 것을 나 스스로 발견해 냈다는 기쁨과 자부심이 몽글몽글 솟았다.

(덤으로 목 줄 없는 강아지 세 마리를 만나 당황했던 에피소드도 지금에 와선 원망 없이 값지다고 생각한다. 나를 향해 세차게 짖던 세 마리는 주인할머니가 나와 데리고 들어갔다. 그 일분여도 안 되는 시간이 마치 몇십분처럼 길게 느껴졌었다.)


몰타에서의 1년은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하고 방탕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언젠가는 꼭 그 시간들을 기록해 남겨야지.'

마음먹은 지 5~6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때의 일들을 쓰려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제는 그 때의 사진을 뒤져봐도 '이 사진이 내가 찍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다. 사진을 뒤져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고 글을 구상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나의 2019년에 대해 적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잊힐게 분명하기 때문이다.(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이만큼이나 기억하는 것도 굉장히 대견한 일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때 일기라도 열심히 적어두는 건데. 당시에 짤막하게 적었던 일기가 있어 이를 공유하며 '몰타 한 바퀴'를 마치고자 한다.

2019년 4월 22일의 일기
어제와 똑같은 가방이 오늘은 불편해서 가방끈을 늘였다 줄였다 해본다.
어제 아프던 발목이 오늘은 거뜬해서 신나게 걷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른 쪽 무릎이 다시 욱신거리기도 한다.

시골길을 한참 걷다가 문득마을을 만나면 그게 그렇게 반갑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시골길로 접어들 때면 금방 또 청보리밭과 꽃들에 눈이 홀렸다.

생각에 골몰하게 되면, 어느 한 구석에 시선을 꽂아두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내 골몰한 생각은 어느 카페의 찻잔 속이든 벽 모서리 한 구석이든 자리를 잡아서, 시간이 흐를수록 풀어낼 엄두가 안 날 만큼 엉킨 채 그 공간에 가득 차버린다. 그럼 나는, 다시는 그곳에 갈 수가 없게 된다. 걷는다는 건 그래서 좋았다. 스쳐가는 풍경들에, 내 발걸음마다에 그 생각을 두고 오면 그만이었다.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이야 어찌 되든 좋았다. 시야에 모두 닿지도 않는 풍경, 여기저기에 흩뿌려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게 뭐든 어떠랴 싶어졌다.

몰타 한 바퀴 프로젝트 기록


목요일 연재
이전 07화걸어서 몰타 한 바퀴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