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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담 Dec 03. 2024

11화. 무너지는 신념




  늦은 오후, 병원 복도는 하루의 끝자락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오고 갔고, 각종 기계음이 곳곳에서 섞여 들려왔다. 그러나 그 움직임과 소리의 중심에 서있던 영남은 한없이 고요했다. 그는 모니터 앞에 앉아 마지막 환자의 차트를 띄워 놓은 채, 스크롤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숫자와 기록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또 다른 무언가는 감추고 있는 듯했다.



  '허리 통증. 만성적. 혈액 검사 정상. X-ray 특이사항 없음.'



  이 간단한 진료기록은 그날의 피로한 업무와 더불어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기록은 그의 손끝에서 빠르게 작성되어 갔지만, 환자들의 고통은 숫자와 단어 사이에서 증발하는 듯했다. 그는 마우스를 잠시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병원의 커다란 유리창에 반사된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렸다. 고령의 남성이 딸과 함께 들어왔다. 남성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천천히 걸어왔고, 딸은 그의 팔을 부축하며 아버지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살피고 있었다. 딸의 시선은 진료실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아버지를 놓지 않으려는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영남은 간단히 인사하며 모니터에 뜬 환자의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허리 통증. 만성적.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딸의 표정은 그 기록을 넘어선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추가 정보를 확인하던 영남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 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려 했지만 끝부분이 살짝 떨렸다. "아버지가요. 며칠 통증이 더 심해지셨어요. 혹시, 더 검사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요?"



  그녀의 질문은 마치 컴퓨터 화면 위로 알림 창처럼 떠올랐다. 영남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확인받고자 하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검사 결과는 명확했다. 허리 통증은 오래된 문제였고, 추가 검사를 요구할 만한 새로운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그는 잠시 시계를 보았다. 검사실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추가 검사를 진행하려면 간호사와 직원들의 퇴근이 늦어질 것이다. 병원의 방침이 떠올랐다. '효율적 진료.' 그 문구는 그날의 마지막 선택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당장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 그는 결국 익숙한 문장을 선택했다. "통증이 심할 때 드실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약을 드시고,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다시 내원해 주세요."



  딸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의 얼굴을 훑었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는 가라앉아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그녀의 떨리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남아 있었다. 



***



  며칠 뒤, 영남은 그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복부 동맥류가 터지면서 생긴 문제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영남은 자신이 차트 속 기록을 보며 의심을 밀어냈던 그날의 선택을 떠올렸다. 



  모니터 앞에 앉아 다시 차트를 열었을 때, 그 기록은 더 이상 깔끔하지 않았다. 거기엔 자신이 놓친 질문들, 하지 못했던 선택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것 같았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듯 보였다. 



  그날 밤, 영남은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병원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불빛이 깜빡이는 거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끊임없이 질문이 맴돌았다. "나는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는가?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병원의 하루는 여전히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여전히 하나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 문장은 차트 속 기록보다 선명했고, 병원의 방침보다 무거웠다. 그것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초심이, 그를 다시 붙들고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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