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시작하기 전, 영남은 병원에서 온 공지 메일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 대기 시간 15분 이내 유지 권고].
메일 제목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박혔다. 화면을 터치하자 지침 내용이 펼쳐졌다.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 모든 환자는 예약 시간으로부터 15분 이내로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각 진료실의 대기 시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초과 시 즉각 조치 바랍니다."
그 문장은 마치 병원의 성과 지표가 의사의 신념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영남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화면을 꾹 눌러 닫았다.
'15분.'
그 숫자가 그의 머릿속에서 무겁게 맴돌았다. 평소 진료 중에 시간을 의식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시계 초침이 그의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첫 환자가 들어왔다. 40대 초반의 여성은 만성적인 두통으로 몇 달째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영남은 꼼꼼히 문진을 시작했다.
"언제부터 두통이 시작되셨나요?""
"한 3개월쯤 됐어요. 처음에는 가벼운 편이었는데, 요즘은 점점 심해져서요."
환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대기 환자가 늘고 있어요."
간호사의 눈빛에서 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환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그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계 속 초침 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했다.
"일단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추가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환자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영남은 이미 다음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자가 문을 나서자, 영남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이어 다음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또 그다음 환자.
모든 환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시계 초침 소리가 울렸다. 환자에게 더 필요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의 가슴을 점점 잠식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는 동료들과 식당에 앉았다. 그러나 대화는 어딘가 무겁게 흘러갔다.
"대기 시간 지침 때문에 진료가 너무 빠듯해요. 요즘 환자들도 짜증을 더 내는 것 같고요." 한 동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아요. 설명을 끝내기도 전에 나가야 하는 환자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져요." 다른 동료도 한숨을 내쉬었다.
영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젓가락으로 밥을 몇 번 휘저은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잿빛 하늘 아래 비가 조용히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며 영남은 자신이 이 흐름 속에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의 대화에서 자신이 느끼던 답답함을 들은 것 같았지만, 누구도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병원 방침 아래, 누군가의 목소리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진료를 마친 뒤, 영남은 진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모니터에는 오늘 하루의 대기 시간 데이터가 띄워져 있었다.
[15분 초과 없음].
화면 속 메시지가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과연 이 데이터가 나를 어떤 의사로 만들고 있는가?'
창밖에서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빗물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자신이 그 빗물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작은 물방울.
효율과 신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의 모습은 창밖 흐린 하늘에 그대로 비쳐 있었다.
'나는 이 흐름 속에서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
질문은 끝내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빗소리 속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