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영남은 이사장실로 호출을 받았다. 이사장과의 대면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차트를 정리하며 회의감에 잠겨 있던 그에게, 이번 호출이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닐 거라 직감했다. 병원의 '효율성'이라는 거대한 바퀴와 자신의 진료 철학이 충돌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사장을 고개를 돌려 영남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자리에 앉으세요."
영남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사장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 환자 응급 상황에 대해 보고 받았습니다. 물론, 진료 과정에서 모든 변수를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환자 보호자는 이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영남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환자의 보호자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다. 이사장의 말투는 단호했고, 환자 상태 악화가 마치 그의 책임인 듯한 뉘앙스를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은 최고의 로펌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어요." 이사장은 한숨을 짧게 내쉬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 요즘 선생님 진료가 너무… 느리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옵니다. 꼼꼼한 진료, 물론 좋지요. 하지만 그 시간에 환자 한두 명 더 볼 수 있다면 병원 매출에는 큰 차이가 생깁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이사장은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영남을 응시했다. "병원 운영에 있어 중요한 건 효율성이에요. 효율성을 갖춰야 병원이 유지되고, 유지되어야 더 많은 환자를 살필 수 있습니다."
영남은 깊은숨을 내쉬면서 차가운 현실이 그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사장은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 상황에서도 병원의 목표를 효율성에만 두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이사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사장님, 저도 병원의 운영과 효율성의 중요성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효율성이 모든 진료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환자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치료와 위로를 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사장은 영남이 내뱉은
"위로"라는 단어에 순간 갸우뚱하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진심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을 운영하는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십시오. 병원이 수익을 올려야 병원도 유지될 수 있고, 그래야 환자들도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선생님께서도 병원 매출을 유지해야만 지금처럼 진료를 이어갈 수 있는 겁니다."
이사장의 단호한 태도에 영남은 가슴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사장이 말하는 '효율성'이라는 가치와, 자신이 꿈꿔온 의사로서의 길은 명확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병원이 수익을 지키는 것이 더 많은 환자를 돕는 일이라 하지만, 영남에게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의사의 길이었다.
영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이사장님 말씀대로라면, 제 진료 방식은 병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제가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병원과의 방향성이 다르더라도, 환자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시려면 병원의 방침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안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의 말속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병원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면, 병원에서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영남은 가슴속 깊이 묵직한 감정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지키려는 신념과 병원의 요구 사이에서,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다는 결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진료실로 돌아온 영남은 한동안 텅 빈 진료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가슴을 짓누르는 듯 무거웠다. 이사장과의 대화가 끝난 후에도 그의 말은 영남의 귓가를 맴돌았다.
효율성. 매출.
언제부터 이 단어들이 환자의 삶을 가늠하게 된 걸까.
영남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나는 이곳에서 정말 환자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은 무겁고도 날카로웠다.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려는 그의 초심이 병원의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남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의 목소리에는 다시 한번 결심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