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회진을 마친 후, 영남은 진료실에 들어와 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병원의 베테랑 의사이자, 영남이 형처럼 따르는 민석이었다. 민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영남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영남, 잠깐 얘기 좀 할까?"
민석의 얼굴에는 친근함과 함께 묘한 진지함이 섞여 있었다. 영남은 그를 맞이하며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요즘 힘들지?" 민석은 의자에 앉자마자 부드럽게 물었다.
영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동료로서의 우려에서 나왔지만, 마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 같았다. 한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네, 맞아요. 가끔은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매일 환자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싶지만, 병원은 효율성을 강조하고…….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아서요."
민석은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오랜 시간 동안 현실을 헤쳐온 이의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영남아, 나도 그 마음 잘 알아. 사실 우리 모두 처음엔 환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 민석은 영남이 정리하고 있던 차트에 눈길을 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이란 곳은 결국 수익을 내야 유지되는 곳이고, 우리 역시 그 시스템의 일원일 뿐이야. 너무 이상만 좇다 보면 스스로 지치게 되기 마련이지.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이 걱정되어서 그래."
영남은 잠시 말을 잃었다. 민석의 현실적인 조언이 그가 고민하던 문제의 본질을 찌르고 있었다. 환자들에게 진심을 다하려는 의사로서의 신념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병원 시스템 사이에서 민석은 어떻게 버텨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민석 선배는 어떻게 그 간극을 이겨내셨어요? 때로는 제가 정말 환자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신이 안 들어요." 영남의 목소리에는 혼란과 회의가 서려 있었다.
민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완벽하지 않아. 다만, 주어진 현실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거야. 이상만 좇다가 현실을 놓치는 건 나도 두려웠으니까. 결국, 나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해지지 않으려 애썼어."
민석의 말은 어딘가 차갑고, 어딘가 따뜻했다. 그의 조언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였지만, 영남의 마음은 쉽게 놓아지지 않았다. 민석이 타협을 통해 버텨온 방식을 이해하면서도, 영남은 여전히 자신이 꿈꾸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문득, 간밤 성당에서의 기도가 떠올랐다.
"저는…… 제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좋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어요." 영남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민석은 그 고집스러운 다짐을 들으며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방식대로 해봐.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가도 좋아. 하지만 기억해. 현실의 벽이 너무 높을 땐, 너 자신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해."
***
민석이 떠난 후, 진료실에는 고요함만이 남았다. 영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햇빛이 차갑고도 따뜻하게 그의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그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 신념은 아름다웠지만, 그 신념을 지키는 길을 고되고 험난했다.
'어쩌면 민석 선배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 하지만…'
영남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환자에게 진심을 다하겠다는 마음만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의 결심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여리지만, 그 뿌리는 깊었다.
신념의 길을 고독할지라도, 그는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