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릉.

1월 1일. 경주 문무대왕릉.

by 경주ist

딱 1년 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날은 남자친구인 K를 향한 섭섭함 때문이고 오늘은 예비남편의 신분의 K를 향한 섭섭함(?) 때문이다. 이 마음을 섭섭함이란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12월 31일 저녁, 제야의 타종 행사가 취소되며 예비 시부모님을 초대해 신혼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무래도 불편한 자리지만 그래도 참았다. 눈치 없는 척을 종종 하는 그는 TV 볼륨을 높이고 영화를 같이 보자며 식사가 끝난 부모님을 붙잡았다. 볼륨을 높인 TV소리는 나에겐 소음이지만 그래도 참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예비 시부모님들은 귀가를 준비하셨다.


“내일 새벽 4시에 울산에서 큰어머니와 사촌형이 우리 집으로 올 거야. 같이 해 보러 간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예비시부모님과 헤어짐을 앞두고 함께 있던 자리에서 K가 뱉은 말이다. 나를 놀리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상했으나 시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 애써 웃었다. 그나마 차는 따로 탄다는 말에 다시 한번 참기로 했다. 약속한 새벽 4시, 전례 없는 시간에 일어나 그의 가족을 맞이해야 했다. 겨우 뜬 눈으로 따뜻한 차와 삶은 계란을 내어드렸다. K는 사촌형과 담배를 피우고 나오더니 나에게 모두 함께 내 차를 타고 문무대왕릉으로 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거절할 도리가 없이 새벽 다섯 시, 운전대를 잡았다. 평소 아침잠이 많은 그를 위한 배려였다. 뒷좌석에 앉은 K의 친척. 조수석에 앉은 K. 그렇게 불편한 공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가족들을 배려해 음악 소리를 줄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암흑 같은 새벽 운전길이 한 시간 정도 지속되니 머릿속은 금세 복잡해졌다. 무엇을 위해 지금 이러고 있을까. 원치 않는 새벽기상. 외출. 동행. 운전. 복잡한 생각과 꾸벅꾸벅 조는 그를 보며 도착한 결론은 외로움이었다. 나쁜 기분을 벗어나려 그의 허벅지를 눌러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입을 열어 작게 이야기했다. “일어나. 운전 교대 할래?” 거절한 그는 졸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으나 결국 다 와갈 때쯤, 코를 골며 졸았다. 문무대왕릉 근처에 주차를 겨우 하고서는 곧장 차에서 내렸다. 정수리와 가슴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니 새벽 추위쯤은 문제 되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고 불빛이 없는 길로 혼자 걸었다.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심호흡했다. 잠깐이라도 혼자여야 했다.


혼자만의 시간도 잠시, K는 곧장 따라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차에서 아주 잠깐! 잠깐 존 거 때문에 이래? 다른 가족들도 있는데 왜 그래?” 졸아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기다렸는데. 정말 그 한마디면 다시 하루를 참아낼 마음이 있었는데. 내 욕심이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를 나무라는 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졸았던 그의 행동 때문은 맞지만 틀리다. 차라리 뭐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봐줬으면 어땠을까. 배려하고 운전하고 이곳까지 동행한 모든 내 행동이 미워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끝까지 참아낼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K의 큰어머니와 사촌형의 뒤를 따라 예비 시부모님과 도련님을 만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다 함께 해 뜨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암흑이었던 바다는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지금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내가 편하게 느끼는 어둠과 은은하게 빛나는 바다의 끝. 가만히 지금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허락되지 않았다. 한 번씩 뒤돌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어딘가 어색한 구성원'인 나를 포함한 K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표정을 피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에게 화가 단단히 나버리니 모든 것이 싫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야 하는 것도. 화장실을 가기 위한 길게 늘어진 줄도. 코를 뚫고 들어오는 매연도. 종종 나는 담배냄새와 구운 오징어 냄새까지 최악이었다. 하기 싫은 건 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못된 심성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들은 저마다 핸드폰에 해를 담으려 분주해졌다. 마침내 빼꼼 드러난 새해 첫 해와 함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인파 사이에서 내 상태를 대변하듯 방전되어 꺼져버린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어차피 지금은 찍고 싶은 사진이 없으니 상관없었다. 문무대왕릉 사이로 해가 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바다. 고개를 내밀고야 만 새해 첫 태양은 무지갯빛을 수놓으며 금세 차올랐다. 발가락 끝보다 더 시린 내 마음을 태양이 알기라도 하듯 나를 강하게 비췄다. 검은 사람들은 해의 얼굴을 찍느라 분주했다. 태양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표정이 일그러진 나를 찍는 듯했다. 왼쪽 가슴이 따끔거렸다.


소원을 빌었냐는 도련님 물음에 웃으며 '아니요'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가 아니고. 소원을 빌었는지의 여부를 물어본 도련님은 역시 눈치가 이백 단이다.) 문무대왕릉 사이로 떠오르는 새해 첫 해를 보며 사람들은 행복. 사랑. 돈. 건강. 등등의 소원을 빌었겠지만. 난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원했다. 시간이 빨리 가기 원하는 마음은 불행이다. 나는 새해 첫날, 불행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삼삼오오 사람들은 자리를 떴고 우리 역시 매 쾌한 매연냄새를 따라 이동했다. 차키를 K에게 넘기고는 뒷자리에 앉았다. 마음이 불행하다면 신체라도 편히 쉬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다 같이 모여 아침을 먹고, 카페를 갈 뻔했는데 (내 일그러진 얼굴 때문이었는지) 다행히 곧장 귀가하기로 했다. K는 불안하게도 집으로 향하는 길 역시 졸음운전을 했다. 차라리 사고가 나도 좋다 싶었다. 사고가 날 지언정 다시 한번 오늘 새벽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평소 나였다면 웃어른에게 집에 함께 올라가 차 한잔 함께 하기를 권했을 테지만, 그 말을 힘겹게 여러 번 꾹꾹 참아냈다. 예의 없게 그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게 마음이 불편했음에도 끝까지 참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 얼굴은 더 일그러지고 나의 인성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하나만 묻자며 먼저 말을 걸었다. “너 때문에 큰어머니가 식당 갈 때 우리 차 안 탄 거 알아? 얼마나 불편하셨겠어? 입장 바꿔서 내가 오늘의 너처럼 그러면 좋겠어?” [내가 불편한 건 생각 안 해?]라는 말이 나올뻔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나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싸울 수 있는 에너지가 없고. 그의 첫마디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를 따라 한 발자국 내리면 둘만의 집인데 그 한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늘 나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낀 것이 착각이 아님을 확인했다. 둘만의 집에서까지 외롭고 속상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가 내리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문을 닫고 지하주차장을 눌렀다. 꺼진 핸드폰과 함께 집을 떠났다.


피곤한 탓에 멀리 가지 못했다. 사실 갈 곳 하나 없었다. 새벽 4시에 나와 카페를 갈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 부산이었다면 갈 수 있는 친구집이 3개인데, K를 따라 경주에 정착한 나는 경주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고 하루를 곱씹었다. 역시 불운한 하루. 불행한 새해첫날. 마음 붙일 곳 없이 K의 가족들 사이에서 눈치 보던 시간. 어느 때나 멀리 있던 K. 사과하지 않는 K. 그러다 드는 생각. 그는 우리 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렸나? 부모님 생각. 지금의 내 처지를 혹여나 아빠가 알게 되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꺼진 핸드폰을 아빠에게 들킬까 걱정되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 작년에도 새해첫날 울었었는데. 그렇게 차에서 울다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재중 전화가 없었음을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저녁 9시. 아빠의 전화에 잠깐 깼다. 이 시간에 자고 있었다며 K의 새해첫날 출근여부를 물으시는 걸 보니, 새해 인사나 안부전화 따위는 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외롭고 차가워진 마음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딱딱하게 굳도록 했다. 내 마음속으로 향하는 수로는 있겠지만 나는 다시 따뜻해지는 법을 모른다. 나는 오늘부터 차가운 바다에 자리 잡은 경주 문무대왕릉이 된다.




문무대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능.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된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5화아주 보통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