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빌런.

오늘도 휴가 중입니다:)

by 경주ist

"안녕하십니까-"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 계열의 의상처럼 귀에 띄지 않을 목소리로 인사했다. 두터운 패딩을 벗고 그들과 같은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검은 가방에서 보조배터리, 이어폰, 책을 꺼내며 곁눈질로 탕비실을 확인한다. 아무도 없다면 입장. 초록색 텀블러엔 따뜻한 커피를, 검은색 텀블러엔 정수를 가득 채우며 무슨 요일쯤 되었는지, 오늘의 할 일을 생각한다.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돌아와 카카오톡, 인터넷뉴스, 도면파일을 차례로 열고 핸드크림을 바르며 뉴스부터 확인한다. 아니 잠깐. 나를 조명하는 뉴스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조용한 퇴사’에 이어 또 하나의 ‘조용한’ 트렌드가 직장 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번에는 ‘조용한 휴가’다. 정상 근무일에 최소한의 업무만 하고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며 소극적으로 근무하는 태도를 뜻하는 이 개념이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피앤피뉴스 24.11.19)


딱 걸렸다. 맞아요. 제가 '조용한 휴가'중인 트렌디한 직장인이에요. 다른 누군가에겐 빌런 이겠죠. 채도가 낮은 휴가룩을 입고 주변에 무심한(*2) 만큼 무심한(*1)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해요. 사람이 지나갈 때면 일하는 척을 하죠. 주어진 일만 하고 딴짓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이런 걸 조용한 휴가라고 하는군요. 무서운 알고리즘이네요. 근데 저도 처음부터 조용하게 지내지는 않았는걸요.


뜨겁고 요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십 년이 흘렀음에도 이따금 그리워했기 때문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절이. 도면 그리는 일만큼 몰입되는 것이 없다며 출근을 즐기던 직장인. 수당 없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자처하면서 늘 퇴근을 아쉬워했다. 눈과 머리 굴러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일하고 작동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내게도 존재했다. 하지만 의견이 묵살되는 경험과 말이 와전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으며 점차 입을 닫았다. 수직적인 조직구조, 능력에 따르지 않는 보상, 동료의 잦은 퇴사 등의 이유로 멈춰 섰다. 능력보다 정치가 통하는 조직을 참을 수 없었으며, 이곳에서의 미래가 기대되지 않았다.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상투적인 다짐을 해오던 나는 그 모든 것을 미워하며 떠났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랑했던 만큼이나 미워할 수 있어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이후엔 n 년마다 회사를 옮겼다. 잔혹한 결론부터 말하면, 이직한 회사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를 조용하게 하는 요소는 다음, 그리고 그다음 회사에서도 반복되기 일쑤였다. 중소기업 청년 지원금이 생기고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등 제도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체감하는 회사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능력보단 정치가 통하고 퇴사는 지능순이라며 동료는 떠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마음가짐뿐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뜨거움은 감추고 열정은 접어두고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살기로 했다. 조용하게 지내도 괜찮아 지기로 했다. 그리고 난 그렇게 되었다.


마음 가짐을 바꿨더라도 중소기업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있다. 회사의 존폐가 우려될 때다.

[전체 알림] 안녕하십니까. 1/20(월) 예정이던 12월 급여가 1/24(금) 지급됨을 알려드립니다.

지연 알림엔 죄송하다는 문구가 빠진 지 오래다. '월급지급일' 파일에 지연일 수를 기록했다. 1년에 60일 이상 급여가 밀리면 실업급여 대상자가 된다는데. 머지않은 나의 이야기가 되겠다. 거래처에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밀리고, 월급이 지연되는 경우에는 도망쳐야 할 신호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심신이 편해서다. 이직을 통해 그나마 조금 더 나은 기업으로 꽤 빨리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휴가를 택했다. 직장에 출근하여 퇴근하는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기본적으로 그냥 있었다.


조용한 휴가의 대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가계부와 다이어리를 쓰고. 뉴스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사무실이 조용하다 싶으면 책을 읽는다. 옆자리 동료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키보드로 한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가끔 일하고 주로 쉰다. 작년 여름에는 회사 뒤뜰에 고추, 방울토마토, 가지를 키우고 수확하기도 했다. (대표님 알면 뒷목을 잡으실지도..) 햇살이 좋은 날엔 회사 강아지를 따라 산책한다. 너무 졸리면 이마에 분홍소시지가 그려질 때까지만 잠을 청한다. 아프면 조금 쉬고,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놀고, 삶의 의미도 좀 찾아보면서 시간을 채워 낸다.


휴가 중엔 가끔 방해꾼도 등장한다. 현장 팀장의 방문으로 사무실공기는 사뭇 달라진다. 세상 화나는 일은 그에게만 일어나고 회사 모든 일은 그 혼자서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고성은 기본. 일차원적인 욕설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가 욕을 시작하면 30분은 시끄러울 셈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귓등으로도 듣기 싫다. 떠나야 한다. 두두두두- 원두 갈리는 소리에 귀를 씻고 초록색 텀블러를 챙겨 제2의 휴가지로 떠난다. 현장 끝 작은 사무실엔 두 번째 책상과 이곳을 떠나지 않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박대리~ 주말 잘 보냈어? / 분위기 안 좋아서 피신 왔어? / 어제는 왜 안 왔어? / 나 핸드폰에 이게 잘 안되던데 한번 봐줘. / 이거 보여? 이거 좀 빼줘 봐." 등등-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인다. 가끔은 서로 경쟁하듯 나를 필요로 하는데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 건네는 안부, 따뜻한 말 몇 마디로 꺼지려던 인류애가 채워진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과 사람들은 내가 회사를 떠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다. 괜스레 좋아지는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다.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고는 멋쩍은 웃음으로 유유히 자리를 뜬다. 마지막으로 강아지에게 인사하며 박대리 순회공연의 막을 내린다.


휴가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다. 지금처럼 에세이를 쓰고 퇴고하는 것. 이 시간은 흩어졌던 생각과 감정이 한 곳으로 모이는 시간. 객관적으로 일상을 들여보는 시간. 희미했던 단어들이 선명해지는 시간이다. 쓰기에 몰입하면 시침은 어느새 5를 지난다. 마감에 쫓기는 작가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다. 초고를 서둘러 저장하고, 사라질 준비를 해야겠다. 빌런의 퇴근 인사로 수고하셨습니다는 염치없지 않을까. 이게 좋겠다.

"내일 뵙겠습니다-"



* 무심하다( 무심한 ) 無心하다

1)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없다.

2) 남의 일에 걱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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