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남자.
‘소박하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 이야기는 ‘소박함’ 속에서 다른 듯 같은 마음을 알아차린 이야기다.
*소박하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수수하다 (형용사)
**소박하다; 처나 첩을 박대하다 (동사)
팔꿈치가 시리고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시월이 되었음을 안다. 삼 년 전, K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의 기온도 오늘과 비슷했다. 그때를 회상하니 소박했던* 그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월의 그는 평일 점심시간마다 어느 경주의 산업단지로 나를 보러 왔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김에. 갑자기 줄게 생겨서. 점심을 같이 먹고 싶어서. 그는 시시콜콜한 이유들로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 어느 보호수 아래 정자에서 시간을 더러 보냈다. K는 삼십 분 남짓한 만남을 위해 삼십 분이 넘는 거리를 오갔다. 그렇게 시답잖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설렘을 키워갔다. 그의 말엔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표정과 행동도 솔직했다. 일관되고 무던한 모습에 확신을 가지게 되어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서툰 실력으로 도시락을 싸 오기도 했다. 짜고 새카만 계란 프라이에도 나는 감동했고 그가 안심하도록 웃어 보였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서툴면 어떠한가. 짜면 어떠한가. 노력하는 모습과 그의 소박함을 사랑했다.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자주 행복했다.
서글픈 상황은, 소박했던 사람은 기억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K와 결혼을 앞두고 거처를 함께 하면서 우리는 사소한 일들로 투닥거렸다. 오늘의 그는 소박맞게** 구는 사람이다. 아직, 내가 그의 ‘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K-고기 다 구웠어. 먹으러 와-.
나-아오 짜. 오빠, 소금 넣었어?
K-안 넣었다니까?
나-소금이 씹히는데? 그럼 마늘 소스에 소금 넣었어?
K-고기에 소금 안 넣었어.
나-아니, 소스에 소금 넣었냐고. 왜 말을 똑바로 안 해?
K-고기에 소금 안 넣었어. 내가 지금 틀린 말 해?
나-오빠!! 지금 고기 물어본 거 아니잖아. 소스에 소금 넣었냐고.
K-고기에. 는. 소금 안 넣었다니까?
나-지금 청문회야? 왜 동문서답해???!! 왜 인정을 안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성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듣는 이가 없음에도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 겪는 강도 높은 분노. 성난 마음은 강한 두통을 동반했고 목덜미를 잡고 쓰러진다는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님을 몸소 알게 됐다. 그와 의사소통이 불통인 상황은 최근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핵심이 맞지 않는 이야기로 언쟁을 종종 했다. 별일 아닌 일상에서 이토록 화나게 하다니.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모질게 대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냉랭한 기운을 깨고 그를 먼저 찾았다.
-오빠, 이리 와 봐. K 누군지 알지? 오랜만에 K가 나오는 에세이를 썼거든? 이거 읽어봐.
마땅히 화해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소박맞게 구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는 쑥스러워 에세이 초고를 보여줬다. 마지못해 글을 읽기 시작한 표정만 보아도 그가 어디쯤 읽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한지, 힘이 잔뜩 들어간 눈을 곧장 풀고 입꼬리를 씰룩거린다. 반면에 아침의 일화를 읽으면서는 표정이 점차 심각해지더니 이내 큰 웃음을 터트린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웃긴 게 자기가 마늘 먹었는데 짰으면, 당연히 소금 넣었겠거니~~~ 생각하면 되는데. 그거를 “넣었어, 안 넣었어!” 당연히 마늘에 소금이 들었겠구나~~ 아, 그렇구나~~ 속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소금 넣었어, 안 넣었어!” 아니, 자기가 짜다며!! 마늘 먹었는데 짜다며!! 넣었겠지 그러면! 넣었겠지! 그거를 “넣었어, 안 넣었어!” 참~ 심문하나? 에세이 쓴 거 법원 판사님 안테 가져다 주나? 심문하나 지금?
이성적이고 무뚝뚝한 내가 감성적인 K에게 속마음을 전하기에는 역시 에세이만 한 게 없다. 웃음과 함께 슬며시 풀린 분위기에 우리는 허심탄회한 대화로 이어갔다. 나를 박대한 이유는 고의성이 크다고 했다. 명령하는 어투와 자세히 따져서 묻는 말들이 그를 긴장시키고 거짓말을 하게 한다며. 취조 받는 기분이 들어 일부러 맛 대응을 했다고. K도 도시락을 먹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어머~ 계란이 너무 크리스피 해요~ 맛있게 먹는 모습이 예뻤다고. 칭찬해 주던 너 역시도 기억에만 존재한다고.
-요즘 넌 어떤지 알아? 오빠아!!! 기름 많이 넣지 마. 배앓이해. 태우지 마. 짜게 하지 마. 매일 잔소리하잖아.
단번에 그를 이해했다. 변한 건 계란 프라이가 아니다. 타박하는 내 앞에서 그는 번번이 잘 못하는 사람, 또는 잘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서툰 그가 아니라 서툴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이었다. 나를 맞춰가다 지쳤을 그의 입장을 생각하니 코 끝이 찡해졌다. 그럼에도 표현에 인색한 나는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 질문을 했다.
-그래서. 앞으로 소박한 사람이 될 거야? 소박하는 사람이 될 거야?
그는 ‘소박한 사람’이라 답한다. 여전히 솔직하고 소박한 사람이다. 시공간이 삼 년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그를 향한 사랑이 마음속 깊이 스몄다. 또한 불어오는 시월의 선선한 바람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를 힘껏 사랑할 것이다. 서툴고 소박한 모습이어도 좋다. 지금 이대로 내 곁에 있어주길. 이번 주말, K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도시락을 챙겨 대곡리 보호수 아래 정자에 가봐야겠다. 구절초가 활짝 펴 있으려나.
K.
ENFP.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본인이 등장하는 에세이만 읽는다. 경주 남자의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으며 근엄해 보이려 하지만 실상은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다. 고집이 발동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