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기
길가에 은행잎이 소복이 쌓여 나뭇가지가 앙상해지면, 겨울 모자와 두툼한 목도리보다 먼저 챙겨두는 것이 있다. 이듬해를 기록할 다이어리. 학생 때부터 쌀쌀 해지면 며칠 상간으로 문구점을 들락거리며 일 년 내내 곁에 둘 다이어리를 가장 먼저 산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에게는 만년형 다이어리가 제격. 두꺼운 다이어리를 시간과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한 장씩 채워나간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 기분 좋은 기대감,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그렇게 한 달 정도는 채우는 삶을 산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는 건, 해낸 것이 없었다는 것과도 비슷한 말일까. 호기롭게 채우던 다이어리의 유효기간은 고작 두어 달. 몇 년 전, 이사하며 이고 지고 살아온 그간의 다이어리를 정리했다.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나는 시작도 포기도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다이어리 앞부분은 일반 쓰레기로 나머지는 전부 재활용으로 버려질 정도로 깨끗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아 쓰임을 잃은 순백의 종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했던 것도 체중감량에 실패해 온 것도 당연해. 끈기와 열정 없는 나에게 그것은 욕심이었어. 그날 이후 다이어리를 사는 것도, 신년 계획을 세우는 일도 그만뒀다. 이루지 못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낭비처럼 느껴져하지 않기로 했다.
다이어리가 없는 한 해의 시작은 불안한 마음을 동반했다. 20대의 삶을 계획과 기록 없이 그저 살아지는 채로 밋밋하게 보내도 괜찮은 것인지 해가 바뀔 때마다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특별한 결단도 내리지 않은 채로 일상을 살다 보면 시간은 지나간다. 불안한 마음은 연초에만 잘 눌러내면 된다. 불안함도 적응
이 된다.
23년도 겨울은 내게 유난히 추웠다. 직장인으로 위장한 서른한 살의 백수. 어느 커피숍에서 콘센트와 화장실을 온종일 쓰는 손님. 약속하나 없는 하루가 아쉬워 잠에 들지 못하는 청년.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직장인인 척 연기했다. 커피숍이 아니면 이불속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 퇴사했더니, 백수의 삶은 더욱 단조롭고, 춥고, 무력했다.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취미가 많아진 오늘날엔, 과로사하는 백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커피 한 잔으로 취업 포털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여러 날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17잔의 커피는 카페 정책에 따라 초록색 표지의 다이어리가 되었다. 이유 모를 따뜻함에 눈치챘다. 대부분 다이어리의 표지는 따뜻한 계열의 색상이라는 것을. 다시는 쓰지 않기로 했지만, 여전히 신년계획 따윈 없지만, 심지어 직장도 꿈도 없이 쓴다고 달라질 게 없었는데도, 그냥 써볼까 싶어 졌다. 그렇게 다시, 쓰기 시작했다.
주로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를 썼다.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을 본다. 첫 출근을 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또다시 첫 출근을 한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회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듬성듬성 해졌지만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 SNS, 유튜브 같은 것을 기웃거렸다. 수집된 지식과 영감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꿔주지 않았지만, 하루. 어쩌면 한순간이나마 삶을 열심히 살게 했다. 깨끗한 페이지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어느 날은 낯선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그다음 해에는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에세이 워크숍에서 글을 쓰고, 다이빙을 배워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동해 바다에서 호흡했다. 써둬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렇게 처음으로, 다이어리를 거의 다 채웠다.
쉽게 포기하더라도 쓰는 삶은 보다 더 좋은 곳. 또는 좋은 기분으로 이끈다. 이젠 다이어리를 위한 17잔의 커피를 마신다. 25년은 청록색 다이어리. 다만, 한 가지 걱정거리는 여전히 채우지 못하는 페이지가 있다는 것이다. '올해 이루고 싶은 계획'은 2년 내내 여전히 빈 페이지로 남았다. 25년에도 못 채우려나. 학생 시절엔 다이어리 뒷부분을 쓰지 못했고, 이후엔 그 어떤 기록도 하지 않다가, 서른이 넘어서는 신년 계획을 좀처럼 쓰지 못하고 있다. 또 포기할까 봐 망설여진다. 올해는 어떨까. 하얀 페이지를 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며칠 후…
지난 주말, K와 경주의 어느 카페를 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습관처럼 다이어리를 꺼내뒀다. 그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라디오 삼아 다른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다 벽면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을 충전하세요’였는데 언뜻 보기에 ‘사람을 충전하세요’ 같아 보였다. 그래, 좀 충전될 필요가 있지. 달달한 크림과 짭조름한 캐러멜 솔트가 뿌려진 라테를 홀짝거리며 커피 한 잔으로 충전되길 바랐다. 정오의 볕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에 충분했고, 손님이 하나둘 줄어들며 카페의 음악소리는 더 커졌다. 라테 한잔과 한적한 분위기로 가득 충전됨을 느꼈다. 끝내 올해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신년 계획.> 집안일 미루지 않기. 배드민턴 A로 승급하기. N만원 부채 갚기. 24편의 에세이 쓰기. 동해에
서 문어 잡아 보기.
해내지 못해도 좋다. 이미 올해의 첫 걱정거리가 해결되었고, 앞으로도 쓰는 삶을 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