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와 환멸 사이에서 술꾼의 길로 접어들다

술이 좋았다. 술에 취한 나는 매력적인 존재인 것 같았으니까.

by 윤해원

마사이족 남성들은 사자와 싸워 이기고 생피를 마신 뒤 얼굴과 팔다리에 날카로운 칼로 흉터를 새기는 성인식을 치른다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만 차면 아무런 조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도 2014년에 아무 절차 없이 성인이 되었다.


나이 앞자리가 2로 바뀌자마자 누릴 수 있게 되는 수많은 자유들. 이젠 정말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 생경했다. 언제까지고 내게는 알코올이 '일탈'이고 금지된 무언가일 줄 알았는데.


그러나 성인이 되면 신체와 정신에 유해한 중독성 물질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 국가가 그걸 허용한다는 건 어째 이상하다. 그건 건강을, 관계를, 경제적 상황을, 나아가 인생 그 자체를 망칠 자유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어쨌든 십대의 마지막 날이었던 2013년 12월 31일에는 친구를 만나 심야 영화를 봤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새해를 맞이하며 보기에 딱 적당할 만큼의 감동과 여운을 주는 영화였다. 각자의 감상에 젖어 약간 촉촉해진 눈빛을 한 채 밖으로 나와보니 우린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영화 따위나 보려고 만난 게 아니었다. 술이 우리의 진짜 목적이었다. 메뉴를 차분하게 정할 여유는 없었다. 영화관 바로 앞 고깃집으로 달려가 참이슬 후레쉬를 시켰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말에 나도, 친구도 자랑스럽게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술이 아니었는데도 몹시 설렜다. 식당에서 당당히 술을 주문해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스무 살의 첫 소주는 달았다. 친구는 두어 잔 만에 얼굴이 벌게졌고 내 기분은 놓쳐버린 헬륨 풍선처럼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나는 알코올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이미 잘 알았다. 그래서 그날은 그리 과음하지 않았고, 친구에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다.


즐거운 겨울 밤이었다. 술을 마시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니 놀라웠다. 우린 막차를 보내고 24시 카페에서 졸린 눈으로 함께 새벽을 지새웠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해가 뜨자마자 녹아버리는 그런 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날은 드물게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알코올이 주는 행복에 취해본 날이었지만, 내가 술을 마실 날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정말 한참이나. 나는 앞으로도 술 때문에 수많은 잘못들을 저지르고 용서받을 것이 분명했다. 친구들은 말하겠지. 술이 문제라고. 해원이는 참 재밌고 괜찮은 앤데, 그놈의 술이 문제라는 말들을 난 한동안 믿을 거였다.




특별히 낯을 가린다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어울릴 때 술이 도움을 줬던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이십대 초중반까지 대부분의 만남은 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술 없이 논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재미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용기가 샘솟게 해주는 마법의 물약이었다. 지루한 자리에도 약간의(사실은 많은 양의) 소주와 맥주만 있으면 금세 활력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나는 '노잼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마셔야 했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주량을 증명해 보이면 더 많은 술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와, 진짜 잘 마신다'라는 말을 듣는 게 좋아서,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주는 게 기뻐서 술을 마셨다.


알코올은 인간관계의 핵심이었다. 내가 맺은 모든 관계가 술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었고 함께 취하는 밤이 많아질수록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술 대신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그들을 만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물론 주취폭력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게 아니었다. 싸울 이유가 없는 친구들과 여전히 싸우고 다녔고, 때로는 누군지도 모르는 옆 테이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진술서를 쓰고 풀려나기도 했다.


그래도 술에 '적당히' 취하면 윤해원은 같이 놀기에 재밌는 애였다. 나한테 맞은 적이 있는 친구들조차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곁에서 술을 마셔주었다(참 미안하고 고맙다). 만취하여 을 넘어버리기 전까지는 좋은 친구와 귀여운 동생 역할을 얼마든지 해냈으므로 나는 줄곧 '실수'하면서, 그리고 또 용서받으면서 사람들 속에 머물렀다.


물만 마셔도 토하며 온종일 변기통을 붙들고 있게 되는 숙취를 몇 번이나 겪으면서도 술은 싫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좋아하게 됐다. 술기운이 오르며 평소보다 밝아지고 활달해지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실패하지 않는 농담을 수십 개씩 떠올려내고 적중시키는 재치는 오로지 알코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나를 그렇게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교적인 나. 모두를 웃게 만드는 나. 이 자리의 주인공인 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야 모르는 일이지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라 해도 그런 착각에 잠시라도 의심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술의 마력을 사랑했다.


술에서 깨는 순간은 마법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람들과 헤어져 홀로 걸으며 밤바람을 맞는 즉시 알코올이 안겨준 모든 환상이 꿈처럼 달아나버리던 것을 기억한다. 내뱉는 숨결에서는 여전히 소주 냄새가 느껴지지만, 정신만은 명료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나의 초라함을 인식할 수 있었던 시간.


스무 살 때 숱한 밤을 함께했던 H 언니는 맥주를 마시고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말했었다. 해원아, 술을 마시면 당장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잖아? 그런데 아니야. 사실 알코올은 기분을 다운시키는 약물이거든.


술을 마시면 처음 1~2시간 동안은 GABA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불안감이 줄어들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또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 수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며, 뇌의 보상 회로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쾌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음주 후 2~6시간에 걸쳐 알코올이 억제하던 흥분성 신경전달물질 글루타메이트가 반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조함을 유발한다. 도파민, 세로토닌 등 기분을 좋게 해주던 신경전달물질은 일시적으로 고갈되므로 우울감이 나타난다. 그리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증가해 기분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스무 살의 어느 밤에 H 언니가 알려주었던 그 진실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아직 술 때문에 우울해진 날보다 즐겁게 보낸 날이 더 많았던 시기였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알코올의 마법에서 깨어나는 환멸의 경험이 더 많아지면서, 나는 비로소 H 언니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코올이 작용하는 기전을 알게 됐다고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마셔온 술을 단박에 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술이 두려워지는 밤마다 더더욱 술을 찾았다. 외로움과 우울함을 떨치려면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술을 마셔야 했다. <어린 왕자>의 술꾼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 나도 어느덧 그런 술꾼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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