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맥주가 술이야? 맥주는 그냥 보리맛 음료수지!
오랫동안 4캔 만원으로 가격이 동결되어 있었던 편의점 세계맥주는 어느 순간 4캔 11,000원으로 값이 오르더니 12,000원을 거쳐 이제는 13,000원 선까지 올라와버렸다. 하지만 내가 세계맥주를 한창 마시던 시절에는 분명 4캔 만원이었고 그게 더 어감이 좋기도 하니, 이 글에서는 해당 행사를 '세계맥주 4캔 만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원래 맥주란 내게 맛없는 술의 대명사였다. 오줌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오줌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심지어 색깔도 오줌과 흡사하지 않은가…….
미성년자 시절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에도 카스나 하이트 같은 건 마시지 않았다. 졸업여행 때 우리가 각자의 캐리어 속에 잔뜩 숨겨 왔던 건 KGB, 크루저, 머드셰이크 등의 RTD 주류였다. RTD는 비싼 편이었고 그 무렵에는 편의점 주류 행사도 없었지만 우린 한 잔을 덜 마시더라도 맛있게 취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런 술을 사곤 했다.
RTD를 향한 우리의 애호는 스무 살이 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쓰고 맛없더라도 소주를 택하는 날이 많아졌고, 그게 더 쉽고 싸게 만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던 해인 2014년은 맥주창고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다.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환하게 네온 불빛을 밝혀둔 세계맥주 전문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가본 몇 명이 '국산이랑은 차원이 달라'라는 후기를 전해주었고, 가서 마셔보니, 음, 확실히 다르긴 했다.
한동안 열심히 맥주를 마시러 다녔다. 소주에 비해 종류가 훨씬 많아서 선택의 폭도 넓은 맥주는 나에게 처음으로 술에 대한 '취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스무 살의 우리는 맥주창고에 몇 차례 가보고 나서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야, 카스가 술이냐? 그게 맥주야? 진짜 맥주는 OO지! (OO 자리에는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기네스, 호가든, 에델바이스 등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날들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정말로 달랐는가? 해외의 몇몇 맥주들이 실제로 국산 맥주보다 더 좋은 홉을 사용해서, 더 우수한 공법으로 만들어지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그 맛을 구분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만약 지금 눈을 가리고 카스와 칭따오를 한 모금씩 마셔서 어떤 게 무슨 맥주인지 가려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글쎄. 내가 그 둘을 단박에 구별해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세계맥주에 열광한 건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맥주는 이름부터 이미 근사하다. 블루 문이라니, 빅 웨이브라니. 디자인은 또 얼마나 예쁜가. 블루 문에는 이름처럼 푸른 달이 그려져 있고, 빅 웨이브에는 커다란 파도 앞에서 카누의 노를 저어 가는 사람 넷이 그려져 있다. 나는 특히 빅 웨이브를 좋아해서 자주 마셨는데 그랬던 데에는 패키지 디자인이 큰 영향을 줬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제품을 구매하는 건 장면과 느낌을 사는 것이다. 시원한 냉장고에서 아름다운 맥주 한 병을 꺼내 어두운 조명 아래에 앉는 장면. 맥주 회사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느낌. 병따개로 뚜껑을 들어올리면 그것이 뒤로 젖혀지면서 내는 경쾌한 '뽕' 소리, 날씬한 병목을 감싸쥘 때의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 마침내 맥주가 입술을 적시고 입안을 지나 목구멍을 약간 따끔거리게 하며 내려갈 때의 상쾌함. 그 느낌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맥주를 산다.
물론 맥주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사실 소주는 다소 버거운 술이지 않은가. 참이슬의 알코올 도수는 줄곧 낮아져오고 있지만 상당히 순해진 지금도 16도이고, 2014년에는 17.8도였다. 희석식 소주의 특성상 숙취도 심한 편이니 아무래도 매일 폭음하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이십대 초반을 지나오는 동안 '가볍게 마실' 땐 맥주를, '죽자고 마실' 땐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되어갔다.
2014년은 GS25 편의점에서 세계맥주 4캔 만원 행사를 최초로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아마 맥주창고 열풍을 의식한 게 아닐까?
GS25가 '신상'이라며 속속 들여놓는 다양한 해외 맥주. 맥주창고까지 일부러 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컸던 이 행사는 다른 편의점 브랜드로도 빠르게 퍼져나가더니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됐다. 이게 원래는 마케팅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태초부터 맥주는 4캔에 만원이었던 것만 같은 이 느낌…….
퇴근한 뒤 샤워를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따는 걸 '힐링'이라고 부르고 '혼술'이라며 낭만화하는 경향은, 맥주창고에 가는 대신 집을 맥주창고로 만들어도 좋다는 이 마케팅과 함께 시작된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에게 주는 향긋한 세계맥주 한 캔, 오직 나만을 위한 소중한 시간. 그런 마음으로 밤마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해외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나도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밤마다 GS25로 달려가 세계맥주 4캔을 사오는 게 어느덧 루틴이 되었다. 그건 이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2010년대 초반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술이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마시는 거였다. 친구들과 더 재미있게 놀기 위해 한 잔. 가족 모임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한 잔. 연인과 낭만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한 잔. 술을 혼자서 마시는 건 중증 알코올 중독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라. 원래 우리에게는 '혼술'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확산된 건 적어도 2015년 이후의 일이다. 네이버 뉴스 탭에서 '혼술'을 검색해보면 2014년 12월 31일까지는 기사가 전혀 없다가 2015년부터 언급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혼자 술을 마시면 '폐인'이라고? 그런 건 이제 구닥다리의 편견일 뿐이었다.
맥주창고를 떠나 집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나의 음주는 두 세계로 양분되었다. 주로 소주나 소맥을 마구 마셔대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의 세계, 그리고 집에서 홀로 느긋하게 마시는 '혼술'의 세계.
술자리는 싫어하고 혼자 마시는 술만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어느 쪽이든 좋았다. 심지어 회식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약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억지로 술을 마시며 텐션을 끌어올려야 하는 회식 자리에서 나는 늘 즐겁게 술을 양껏 마시는 사람이었다(이게 다 공짜라니! 당장 퍼마셔야 돼!).
혼술에는 그것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평화롭게, 나만의 속도로,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다 언제든 중단할 수 있는 편안함. 책, 영화, 음악, 게임 등을 곁들여 세계맥주를 마시는 건 최고의 휴식이었다. 심지어 맥주를 마실 땐 번거롭게 안주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그걸로 끝. 얼마나 간편한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행복한가.
문제는 내가 혼술을 술 마시는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술꾼들끼리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야, 맥주가 무슨 술이냐!' 술을 끊겠다고 선포한 술쟁이 친구들은 이틀쯤은 술을 참아냈다가 사흘째가 되면 조용히 맥주 뚜껑을 따곤 했다.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라고 합리화하며.
나에게도 맥주는 술이 아니라 탄산음료였다. 5%가 될까말까한 알코올 도수는 우습기만 했다. 한 번에 한 캔씩 마시던 맥주가 두 캔, 세 캔으로 점점 늘어가는 동안에도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저녁에는 항상 세계맥주 네 캔이나 여덟 캔이 들어 있는 편의점 비닐 봉투를 손목에 건 채로 귀가했다.
인천에서 자취하던 시기에는 집에 정수기가 없었으므로 수돗물을 끓여 마셨다. 수돗물을 팔팔 끓인 뒤 그걸 식혀서 물통에 담고, 냉장고에 일정 시간 넣어두어야만 찬물을 마실 수 있었다. 더운 여름날 준비해둔 찬물이 똑 떨어지면 당연하다는 듯 맥주를 꺼내 물 대신 마셨다. 그러면서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세계맥주 4캔 만원 행사와 함께, 내게 술은 일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물처럼 술을 마신다는 관용어구가 더는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술을 끊거나 줄여보겠다는 사람에게 이 말부터 한다. 편의점에서 네 캔씩 묶어 파는 세계맥주, 그걸 사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돈이 아깝더라도 한 캔씩만 사와서 먹는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한다.
냉장고에 맥주가 네 캔 들어 있으면 한 캔만 마시고 자려다가도 '두 캔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며 한 캔을 더 마시게 된다. 결국 장기적으로 마시는 양이 늘어날 수 있다.
4캔 만원 세계맥주를 구매하지 않는 건 술을 사는 데에 약간의 귀찮음을 더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직 한 캔씩만 술을 사다 마신다면, 술이 부족해질 때마다 매번 사러 나가야 한다. 음주량을 줄이는 데에 꽤 효과가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노력만으로 습관성 음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