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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17편)

동쪽 창고의 어두운 그림자

by 아르망

달마저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밤,

숲에는 그림자의 숨결 같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잎새를 머금은 나뭇가지들이 실바람에 몸을 뒤적이며 내는 소리만이,

깊이 감추어 둔 숲의 비밀처럼 스산하게 속삭였지요.


그 어둠 아래, 자경단의 여섯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숲 동쪽 가장자리,

잊힌 길 위에 흉터처럼 남겨진 낡은 창고.


한때는 숲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누구의 기억에도

머물지 않는 버려진 공간.

견고한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에는

오늘 밤,

어둠보다 짙은 음모가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대장 리나는 축축한 풀숲에 몸을 낮추었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인 그녀의 예리한 눈은 창고의 실루엣을 꿰뚫고,

밤의 공기를 가르는 바람의 미세한 흐름까지 읽어내고 있었지요.


그때, 그림자처럼 다가온 루칸이 낮은 목소리로 모두에게 속삭였습니다.


“여긴 단순한 물품 저장고가 아니야.

카르 갱단이 이곳에서 숲 전체를 위협할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첩보야.

앞뒤로 난 출입구,

그리고 내부에 설치된 화물용 리프트까지…

아주 치밀하게 이 공간을 기계들로 개조했어.”


‘기계’라는 단어가 차가운 얼음처럼 모두의 가슴에 철썩 떨어졌습니다.

숲의 일원인 그들에게 기계란, 살아있는 나무를 파고드는 차가운 톱날이자,

대지의 부드러운 마음을 파헤치는 도둑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에게 파괴와 상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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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칸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 기계는 아직 미완성 단계라고 해.

하지만 오늘 밤, 기계의 심장이 될

핵심 부품과 설계도가 담긴 상자를 외부로 옮길 거라는 정보야.


리나가 굳게 다문 입으로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우리의 임무는 단 하나, 그 상자를 탈취해

카르의 야망을 뿌리부터 잘라내는 것이다.”


작전의 개요는 이전과 같았지만 이번 임무는

안개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기계’라는 적을 상대해야 했기에,

자경단의 마음속에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자리했습니다.


"적의 경계가 삼엄하구나. 모두 이리 오렴.

이건 '바람이끼'와 '침묵초'의 진액이야.

우리의 숨결을 숲의 일부로 만들어주지."


벨라가 나누어 준 향유를 바르자,

마치 안개처럼 숲의 기운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벨라는 약초 가방에서 '하룻밤의 꿈가루'로

불리는 '꿈나비 버섯 포자'를 꺼냈습니다.

"이건 내가 힘들게 구해서 만든 거야.

조금밖에 없어서 아껴 써야 하지."


"이 포자를 바람에 실려 보내면, 입구를 지키는

저 족제비들은 깊은 잠에 빠져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될 거야.

조용히 잠입해야 하는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지."


"와~이거 진짜 좋은데요?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되는 멋진 약초네요!!"

토리가 감탄하며 말하자 모두들 미소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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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바람의 방향을 잘 잡아서.. 옳지, 이때다!!"

바람이 부는 때를 기다리던 벨라가 포자를 공중으로 흘려보내자,

곧이어 입구를 지키던 족제비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감탄하는 표정으로 벨라를 쳐다보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나가 앞으로 전진하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창고의 낡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광적인 냉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잠입한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곳은 창고라기보다,

어느 미치광이 과학자의 뒤틀린 꿈속 같은 실험실이었지요.


기괴한 톱니바퀴들이 벽에 걸려 희미한 빛을 반사했고,

구리선 다발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습니다.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은 유령 같은 빛을 토해냈고,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와 기름 냄새가 머리를 아찔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혼돈의 중심에,

여우 카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족제비 부하들이 어설프게 조립한 부품을 날카롭게 살피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멍청한 것들! 이래서 감정이 있는 동물이란!

그런 하찮은 변수 때문에 부품의 정밀도가 계속 오차를 일으키지 않나!

완벽한 기계는 완벽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완벽한 마음이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텅 빈 마음이지!”


카르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거대한 설계도를 희열에 찬 손끝으로 쓸었습니다.

그 옆에는 온갖 복잡한 부품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상상해 봐라. 이 기계가 완성되는 날을.

슬픔도, 분노도, 저항하려는 어리석은 의지도…

모두 사라진 세상. 오직 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평화롭고 효율적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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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에 담긴 광기에, 숨어 있던 자경단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토리의 발이 미끄러지며 옆에 있던 낡은 깡통을 걷어차버렸습니다!

우당탕—!


날카로운 소음이 정적을 갈랐고,

창고 안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침입자다!”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닫혔습니다.

자경단 전체가 순식간에 포위되어 버렸습니다!


족제비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포위망을 좁혀왔습니다.

혼란 속에서 리나가 무기를 꺼내 들고 외쳤습니다.

“모두, 내 뒤로!”


그때, 토리의 다급한 외침이 모두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대장님! 저 위를 보세요!”


토리가 가리킨 곳은 천장에 복잡하게 얽힌

화물 운반용 컨베이어 벨트와 낡은 환풍구였습니다.

다른 모두가 눈앞의 ‘적’에 집중할 때,

토리는 ‘공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릴리! 저기 환풍기 덮개를 고정한 밧줄을 쏴줘!

바르크 형! 저기 빨간 레버를 당기면 벨트가 역회전하면서

쌓인 약품 포대들이 쏟아질 거예요!”


토리의 외침에 리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했습니다.

“모두, 토리의 말대로!”


릴리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정확히 밧줄을 끊어냈습니다.

환풍구 덮개가 열리며 그 안에 쌓여 있던

잿빛 먼지와 검댕이 눈처럼 쏟아져 족제비들의 시야를 가렸습니다.


바르크가 온 힘을 다해 레버를 당기자,

컨베이어 벨트가 역회전하며 약품 포대들을

족제비들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습니다.


“콜록! 콜록!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안 보여!”

창고 안은 순식간에 하얀 아수라장이 되었고,

카르는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기침을 토해냈습니다.


그 틈을 타, 토리는 벽을 타고 재빠르게 기어올라

처음 족제비들이 문을 닫을 때 조작했던 제어판으로 향했습니다.


복잡한 톱니바퀴와 레버들 사이에서,

그는 망설임 없이 하나의 레버를 힘껏 당겼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까 철문을 닫는 과정을

토리는 유심히 보고 기억했던 것입니다!

곧이어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리나는 토리의 기지에 감탄하며 외쳤습니다.

“모두, 퇴각하라!”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습니다.

바로 설계도와 부품이 담긴 상자가 문제였지요.


“이런, 저걸 두고 갈 순 없어…!”

리나가 이를 악물었을 때,

어느새 옆으로 돌아온 토리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 제가, 이 상자를 메고 뛸게요.”

“무슨 소리야, 토리! 네 몸만 한 걸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이건 리나 대장님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대장님한테 중요한 건 이제 저한테도 중요한 거예요.

이번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게요.”


리나는 잠시 토리의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평소의 어리숙함은 온데간데없고,

굳은 결의만이 담긴 그 얼굴을.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알았어. 우리들이 네 바로 뒤에서 엄호하지.”


탈출은 처절했습니다.

토리는 상자를 멘 채 낙엽 위를 구르듯 달렸습니다.

어깨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족제비 셋이 토리를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었습니다.

"막아라! 상자를 든 저 다람쥐 놈을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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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너희의 상대는 아직 나잖아?"

릴리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족제비들을 막아섰습니다.

다른 방향에서는 루칸이 족제비들의 뒤로 은밀하게 숨어 한 명씩 기절시켰고,

많은 수의 족제비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면

바르크가 육중한 몸으로 돌격해 토리가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토리, 어서 도망가! 앞만 보고 계속 뛰어!!”

릴리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지만, 토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기진맥진한 토리는 오직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습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기나긴 숲을 가로질러

마침내 자경단의 은신처에 도착하고 나서야,

토리는 땅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토리는

“정말… 정말… 해냈어요…”

말만을 반복하며 가쁜 숨을 몰아내 쉬었습니다.




한편 자경단이 연기처럼 빠져나간 후,

하얀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르는 분노로 몸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분노와 함께 기묘한 광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텅 빈 제어판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처음 보는 다람쥐인데… 저 녀석은 기계의 흐름을 읽는군.

자경단의 부품으로 쓰기엔… 아까운 재능이야.”

카르의 입가에는 훗날을 기약하는, 소름 끼치는 미소가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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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로 돌아온 자경단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로를 얼싸안았습니다.

특히 모두의 시선은 영웅이 된 토리에게로 향했지요.


바르크는 토리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습니다.

“이야, 토리! 너 완전 기계 박사잖아!

어떻게 그걸 한순간에 다 파악한 거야?”


“그러게 말이야, 우리 신입. 점점 더 멋있어지는데?”

릴리도 활짝 웃으며 덧붙였습니다.

동료들의 진심 가득 담긴 찬사에 토리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리나는 한 걸음 뒤에서, 소란스러운 동료들과

그 중심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의 냉철한 전략가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지요.


모두가 토리의 '활약'에 감탄하고 있을 때,

리나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모두가 눈앞의 적에만 집중할 때

혼자서 공간을 읽어내던 놀라운 관찰력.


그리고 자신의 몸만 한 상자를 지고 달리겠다며,

어리숙해 보이던 얼굴에 떠올랐던 굳건한 결의.


[대장님한테 중요한 건 이제 저한테도 중요한 거예요.]

'그건.. 무슨 뜻이지?'


이건 단순한 감탄을 넘어,

가슴 한구석이 말랑말랑거리는 묘한 감정이었습니다.


함께 하고 싶고, 더 알고 싶다는 마음.

리더로서가 아닌, 한 여자로서 느끼는 순수한 이끌림이었습니다.


그녀가 이처럼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토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벨라가 차분히 한 명씩 자리에 앉히고는

상처 부위를 살피며 치료해 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때라는 생각에 리나가 상자를 열며 토리를 불렀습니다.

“토리,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봐줘.”

상자 안에는 조심스럽게 포장된 기계 부품들과,

그 중앙에 놓인 거대한 양피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적힌 굵은 제목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루멘 제로(Lumen Zero) : 기억 제거 장치』

“기억을… 제거한다고?” 리나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상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금속 냄새와

낡은 양피지의 묵은 향이 뒤섞여 코끝에 닿자

리나는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녀의 붉은 머리띠 아래,

결의로 빛나던 갈색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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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 제로(Lumen Zero) : 기억 제거 장치』

그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삶과 추억,

존재의 의미를 통째로 집어삼킬 거대한 입 같았습니다.


리나는 설계도를 쥔 자신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계도 위 복잡하게 얽힌 선들이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혼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흔들리던 눈빛은 어느새 바위처럼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반드시 막아야 할 재앙이자,

그녀의 새로운 전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설계도의 한 점을 가리키려다,

자신도 모르게 토리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모닥불 빛 속에서 서로에게 향했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떼었지만,

그 짧은 순간의 온기는 둘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는듯했습니다.


릴리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설계도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그림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리나와 토리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습니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이제 막 시작된 미묘한 감정과 함께,

다가올 거대한 운명에 함께 맞서 싸우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자경단은 카르의 계획을 저지한 듯 보였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설계도와 부품 상자는

안도감보다 더 큰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의 적은 그저 숲을 차지하려는 악당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마음을 지우려는 끔찍한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계절이 흐른 뒤,

지금은 작은 갱단의 두목이었던 여우 카르가

훗날 대도시 ‘블롯’의 시장이 되어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마침내 ‘루멘 제로’를 완성시키고,

자경단의 작은 영웅 토리는

그 무서운 기계의 표적이 되어 납치되리라는 것을.


운명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이제 막,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다음 편-'그림자가 삼킨 도시'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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