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삼킨 도시
다시 현재, 대도시 블롯.
자경단이 아직 잿빛 숲의 침묵 속에 머물고 있을 무렵,
그들의 목적지인 대도시 '블롯'의 중앙 광장은
눈부신 햇살 아래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잘 닦인 조약돌 길 위로
상점들의 화사한 간판이 햇살을 머금은 채 빛나고,
갓 구운 빵의 달콤한 향기와
향긋한 꽃 내음은 기분 좋게 어우러져
마치 평화로운 낙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눈부신 번영의 심장,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드넓은 광장은
축제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채
저마다의 기쁨을 나누는 도시의 주민들이 한 곳에 모여,
살아있는 색깔들의 다채로운 풍경을 이루었지요.
마침내, 기대와 흥분의 물결이
광장 전체를 휩쓰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높이 솟은 단상 위로
윤기 흐르는 은빛 털을 우아하게 매만진
여우 시장 카르가,
장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의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총명함으로 빛났고,
입가에는 주민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광장을 가득 메운 블롯의 주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터뜨렸습니다.
카르의 목소리는 잘 조율된 첼로 선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광장 전체를 감쌌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마치 모든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따스한 눈빛으로 군중 한 명 한 명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격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카르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실리자,
광장은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분노에 찬 그의 외침에,
군중들의 얼굴에도 점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광장은 열기를 넘어서
거대한 함성으로 폭발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카르! 카르! 우리의 수호자!'를 외치는
시민들의 눈에는 감동의 눈물과 함께,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충성심이 화려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단상을 내려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온화한 얼굴 뒤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웃음이
번뜩이는 것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 완벽한 무대 위에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듯 보였습니다.
도시의 심장이 거짓된 평화로 요동치는 동안,
블롯의 성벽 바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갔습니다.
뜨거웠던 태양의 기억은
거대한 산맥 너머로 희미해지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달빛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외로운 달빛 아래서,
다섯 개의 그림자는 대지 위를
소리 없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도시를 집어삼킬 듯 버티고 선
거대한 굴참나무 아래였습니다.
리나가 턱짓으로 릴리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신호를 받은 릴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무를 박차고 올랐습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나무의 일부처럼 줄기를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꼭대기에 닿더니,
이내 밤의 매처럼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루칸이 잿가루와 깃털로 위장해 준 릴리의 비행막은,
달빛 아래 완벽한 위장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굴참나무에서 도시의 기나긴 지붕으로,
그림자에서 또 다른 그림자로 소리 없이 활공한 릴리는,
몸을 낮추고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것은 저 멀리, 기계처럼 순찰을 도는
비늘이빨단의 냉혹한 실루엣.
그들의 경계가 가장 멀어지고 느슨해진 찰나의 순간,
릴리가 거울 조각으로 달빛을 반사시켜
섬광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언어보다 빠른 신호였습니다.
그 신호를 받은 것은 어둠 속에 있던 그림자, 루칸이었습니다.
그는 은신술을 발동해
주변의 어둠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소리도 흔적도 없이 청설모 군단 초소로 스며들었습니다.
숨 막히는 정적 속, 그의 손에서 발사된
작은 독침 두 개가 허공을 가로질렀습니다.
'픽, 픽' 하는 미세한 소리조차 밤바람에 묻혔고,
두 명의 보초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루칸은 쓰러진 그들을 근처 깊은 수풀 속으로 옮겨,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철저하게 위장했습니다.
"지금이야."
리나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바르크와 벨라가
최대한 몸을 낮춘 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도시 안으로 빠르게 잠입하는 동안,
릴리는 여전히 지붕 위에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비늘이빨단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며
공중의 수호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곧이어 하수구 입구에 도착한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릴리가 날개를 펴려는 순간,
그녀의 눈에 세 명의 비늘이빨단이 골목에서 나타나
하수구 쪽으로 향하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들이 곧 모퉁이를 도는 순간
모든 것이 발각될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릴리가 다급한 섬광 신호를 연달아 보내자,
그것을 알아챈 리나가 즉시
동료들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바르크가 앞으로 나서 육중한 하수구 덮개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습니다.
그의 팔에 굵은 핏줄이 뱀처럼 솟아오르고,
덮개는 쇳소리 대신 둔탁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려났습니다.
그 틈으로 벨라가 재빨리 약초 주머니를 열어,
흔적을 지우는 향을 주변에 흩뿌렸습니다.
비늘이빨단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 나타나기 바로 직전,
하수구의 강철 덮개가 덮이며
세 명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붕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릴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휴… 그래도 무사히 들어갔구나."
하수도 안에서 잠시 멈춰 선 리나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릴리와 루칸이… 오지 못했어.
작전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르크와 벨라, 리나가 하수도로 사라지는
그 숨 막혔던 순간이 지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릴리의 등 뒤로,
도시의 어느 한 건물 창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늦게까지 가게를 정리하던
빵집 주인 수달 '피핀'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시장님의 연설을 들으며,
자신의 작고 소중한 빵집과
가족의 평화를 지켜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었지요.
피핀은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었다가,
저 멀리 지붕 위에서 달빛을 받아
스르르 움직이는 낯선 그림자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보았나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분명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시장님의 목소리가
피핀의 귓가에 메아리쳤습니다.
피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겁에 질렸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족과 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앞치마를 벗어던질 생각도 못한 채,
가게를 뛰쳐나가 골목을 내달렸습니다.
마침 순찰을 돌던 '비늘이빨단'의 실루엣을 발견한
피핀은 숨을 헐떡이며 외쳤습니다.
그 순간, 비늘이빨단 병사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습니다.
즉시 허리춤에 있던 작은 뿔피리를 꺼내,
날카롭고 섬뜩한 소리를 밤공기 속으로
길게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삐이이이 이이익---!!!"
그 소리를 신호로,
도시 곳곳에서 잠복해 있던 순찰대의
뿔피리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고,
평화롭던 도시의 밤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경보음과 육중한 발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지붕 위의 릴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도시는,
자신을 중심으로 횃불의 빛줄기가 뻗어 나가는
거대한 거미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들켜버렸네.
잠깐, 그런데.. 루칸은 어디에 있지?"
밤의 정적을 깨부수는 경보음은
이제 도시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성난 횃불의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오고 있었고,
곳곳에서 강철 장화 소리가 땅을 울리며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도시의 모든 창문 하나,
어두운 골목 하나도
자경단을 향해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땅 아래, 차가운 하수도 속에서
리나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도시 전체가 괴물처럼 깨어나
자신들을 짓누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었습니다.
촘촘하게 조여 오는 포위망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자경단은 이제 각자의 절망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다음 편-'도시의 추격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