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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은벼 Nov 28. 2024

무료 관람권이 도착했습니다!

타인의 삶을 관람하는 태도 

너는 정말 질투가 없는 것 같아.



멕시코로 떠나오기 전 나는 오랜 벗들을 서울로 초대했다. 고만고만한 시기에 낳은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랴 살림하랴, 각자 인생에 뛰어든 험준한 장애물을 굽이굽이 뛰어넘느라 차일피일 미뤄 두었던 여행이었다.

타국만리로 떠나는 나를 배려해 여행은 일사천리로 앞당겨졌고, 제법 자란 아이들에게도 또 오랜만에 몇 날 밤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우리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전쟁 같은 한나절을 남김없이 불태운 후 숙소에 둘러앉은 네 명의 여고 동창은 요절복통 과거를 안주 삼아 단짠단짠 현재를 마셔대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친구가 나를 보며 확신에 찬 얼굴로 나지막이 한 마디를 던진 것이다.


질투라.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세상에 질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벗의 말을 발판 삼아 내 안으로 시나브로 들어가다 보니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바야흐로 질투와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붙게 되는 꼬리표는 머지않아 등급이라는 갈림길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상하이동이 쉽지 않은 평행길을 걷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길을 걸었다. 주변을 보아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등급과 맞닿아 있지 않은 자신만의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였던 다른 등급의 삶을 미디어를 통해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시기, 질투, 박탈감, 절망, 패배감 등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새로운 감정들과 마주해야 했다.

불평 없이 그저 주어진 걸었지만 다른 길에 존재하는 화려한 세상은 내가 걷는 이 길 끝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신기루였다.

닿을 수 없는 동경은 각종 혐오와 저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TV 드라마에서 부잣집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20평도 채 되지 않는 아파트에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당시,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비슷한 아파트에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부자들의 삶은 꿈에서조차 본 적 없었던 호화로움 그 자체였다.


집 안에 계단이 있네! 

소파를 저렇게 빙 둘러서 놓을 수도 있구나! 

집안일을 해주는 가정부가 이렇게나 많다니! 거기에 기사까지 있잖아!


TV에서 눈을 떼자마자 보이는 낡은 살림살이와 좁아터진 집구석의 초라함은 어린 나에게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드라마 인어아가씨 中




 


다른 애들은 전부 다 입고 있단 말이야. 나도 사줘. 사주면 안 돼?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대학생 딸이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조르기 시전을 한다. 

'나만 빼고 다 있어'라는 말이 엄마의 지갑을 열게 하는 트리거가 된다는 것을 여우 같은 딸은 알고 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잔소리 공격을 오백 번쯤 받아내고 나면 내 손에 원하는 것이 들려있을 거라는 것도.


여우 같은 딸이었던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다른 등급의 세계를 알아 버렸다.

입학 전 시내에 있는 쇼핑몰에서 큰맘 먹고 샀던 옷들이 그저 싸구려 지방패션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 보자마자 딱 지방에서 온 것 같더라."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소개를 끝냈건만 한 남자 선배는 내 경상도 억양과 패션에만 집중하고 있었나 보다.

나름 열심히 꾸미고 갔던 첫 동아리 총회였는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만큼 자존심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그 이후 집에 내려갈 때마다, 아빠가 용돈을 보내줄 때마다, 짬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나는 쇼핑에 열을 올렸다. 밥을 굶어서라도, 교재를 더 사야 한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는 옷을 샀다. 아니 정확히는 사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도 한 벌에 10만 원이 넘는 폴로 옷들은 좀처럼 옷장을 채우지 못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는 나와는 달리 주변의 친구들은 당연하듯 매일같이 다른 폴로 패션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TV에서 보았던 부잣집의 모습이 초라한 내 옷장 위로 평행선이 되어 내려앉았다.

집 안에서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가정부에게 물 한 잔 가져다 달라는 부잣집 사모님의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내 안의 TV가 꺼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 폴로 남방이 듬성듬성 초라하게 걸려 있는 내 옷장이 잔상이 되어 남았다.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녀석과 마주했.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패션








우물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개구리의 삶은 고단했다. 

졸업과 동시에 가까스로 취업을 했지만, 서울살이에 대한 자릿값을 내고 나니 수중에 남는 것이라고는 알량한 푼돈뿐이었다.


대신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TV에서나 보던 부잣집의 삶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으니 서울살이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와 같은 회사를 다녔던 A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살고 있는 밝고 명랑한 사원이었다.


그녀와 말을 섞고 있노라면 금세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녀의 말을 양탄자 삼아 다른 등급의 평행선을 요리조리 넘나들 수 있었다.


내가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 일요일 아침 8시 역기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을 때 그녀는 매년 미국 디즈니랜드를 방문했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내가 떡볶이냐 순대냐 맛탐방에 여념이 없을 때 그녀는 미국 보딩스쿨에서 아메리칸 조식을 먹고 있었다.

내가 H.O.T 오빠들에 열광하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비디오테이프를 감고 있을 때 그녀는 파티에서 만났던 유명회사 오너 아들과 사귀고 있었다나 뭐라나.


끊어진 샌들끈을 개의치 않고 슬리퍼처럼 끌고 다녔던 그녀는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했고, 탄탄한 회사의 창업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그녀의 이혼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 B언니의 어린 시절은 나와는 한참 달랐다.


의사였던 부모님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던 언니는 그들의 방식대로 성장해야 했다. 정기적인 친척 모임에서는 플루트를 연주해야 했고, 새벽 줄 서기로 엄마가 쟁취한 수강증대로 학원을 쳇바퀴 돌듯 다녀야 했다. 자아를 잃은 그녀에게는 어떠한 선택권이나 거부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B언니는 두 아들을 꽤 오랜 시간 동안 학원에 보내지 않고 놀이터와 숲을 오가며 키웠다. 

제일 먼저 놀이터 출근 도장을 찍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1등 놀이 대장으로 아이들을 키워내면서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언니였다.

아들 한 명 키우면서 매일을 정년이처럼 득음하는 나와는 달리 차근차근하면서도 가끔은 단호했던 언니는 열혈 놀이 대장들을 늠름하게 다듬어냈고, 그 모습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었지만 강압적인 부모의 교육방식은 언니에게 상처로 남았고,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녀와 늘 붙어 있던 육아서와 아이들의 킥보드는 그 노력의 산증인이었고, 엄마만 보면 하트가 발사되는 두 아들은 그 결과물이었다.


상처 위에 탄탄히 세운 그녀의 자녀 교육은 대성공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만난 C는 약사였다. 


나와 동갑이지만 강남 한복판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약국을 운영하는 수완 좋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재테크까지 잘해서 강남에 아파트 두 채뿐 아니라 건물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집 안의 기대주였던 언니에게 밀려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랐다고 했다. 

다행히 학원비는 기꺼이 내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스스로 학원을 알아보고 다녔던 생활이 너무도 즐거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던 그녀.

학원에 치여 나날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가는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요즈음의 행태와는 전혀 반대되는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도 신선했다. 

그녀는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 공부했고, 그 노력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고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학창 시절 후회되는 부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자꾸만 그 시간으로 타임 슬립하여 현재를 요리조리 바꿔보던 내가 한없이 지질해 보인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와 비슷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교점을 발견한 순간 내 앞의 그녀는 더욱 위대해 보였다.




 




어린 시절 TV에 비친 다른 등급의 삶은 자극적 화려함 속에 담긴 정제된 허구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삶을 통해 조우한 다른 등급의 삶은 나와는 결이 다를지라도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고, 화려함에 대한 대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불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느낀 후부터, 아니 정확히는 내게 지방패션을 운운했던 그 선배가 사실 경기도 의정부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조금 편안해졌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등급에 있으면서도 나를 내려치기 혹은 억까했던 그 선배와는 다른 방식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이후부터 나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찬란한 세계에 현혹되지 않은 채 주변인의 삶을 관람하기로 했다. 

OTT 정기 구매를 하거나 가장 싼 영화 티켓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락날락이는 수고스러움 하나 없이 완전히 공짜로 말이다. 

이 얼마나 편안하게 취할 수 있는 이득인가.

가끔 그들에게 식사나 커피를 대접하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이득에 비하면 전혀 아까울 것 없는 관람료다.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다른 등급의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을 그러한 시선으로 보게 되면 질투나 혐오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간접 경험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마음 그릇을 키우게 되었고, 더 이상 그들의 삶에 나의 현재를 잔상으로 남기지 않게 되었다.


그 옛날 모르는 척 지갑을 열어주셨던 부모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내 옷장이 이제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싸구려 쇼핑몰과 세일 기간에 득템 한 아웃렛 옷들로 엉성히 채워져 있지만.


나는 타인의 삶을 응원하는 관람객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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