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라프 Nov 04. 2024

이번 정차역 내리실 문은, 문이 열리는 쪽입니다.

KTX 승무원의 승객 일지

#4. 이번 정차역 내리실 문은… 문이 열리는 쪽입니다.


“열리는 쪽이 내릴 문이겠지.”



오늘은 신입 승무원 시절에 겪었던 아찔한 방송 실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승무원의 일은 늘 한 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도 사람인 걸!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열차 객실 방송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GPS에 맞춰 자동으로 나오는 자동방송, 그리고 내가 직접 말하는 육성방송.


GPS가 도와주는 자동방송은 정확하지만, 육성방송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야 해서 어렵다.

컨디션, 외부 잡음, 이례사항, 그리고 가장 흔한 원인인 선로 변경.

모든 것이 낯선 신입 시절에는 긴장되고 미숙한 상태라 실수가 많았다.


그날은 선로 변경이 원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왼쪽으로 내리셔야 하는데 갑자기 선로가 오른쪽으로 변경되면서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처음에는 “왼쪽”이라고 말했다가, “오른쪽”으로 정정하고, 또다시 “왼쪽”으로… 점점 더 미궁에 빠져버린 내 머릿속.

내 심장은 쿵쿵 뛰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정차역 내리실 문은… 문이 열리는 쪽입니다.”

.

.

.


한동안 객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마침내 승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디로 내리라는 거야…?”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당당함이다.

그러니 나는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먼저 내릴게요.”

.

.

.


승객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이 대답에 피식 웃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 속에 서울역에 도착했고,

승객들의 “이번엔 오른쪽 맞죠? “라는 장난스러운 물음에 “맞습니다! 이번엔 확실해요!” 하고 씩 웃으며 승강문의 열림 사인을 체크했다.



누구나 가끔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럴 땐 오히려 웃어넘기며 가볍게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런 작은 실수에 너그럽다.

그 순간, 내가 먼저 웃으니 승객들도 편하게 웃으며 지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가끔은 작은 실수가 서로를 조금 더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진정한 서비스란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대에서 시작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날의 경험은 내가 더 깊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이자,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진심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감사한 실수였다.


늘 느끼는 것은,

승무원으로서 내가 승객을 돕기도 하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나에게 배움을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