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의 승객 일지
#2. 74세의 힙한 혼여행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전주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정차역 도착 2분 전, 객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동 방송에 승객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그중 내 눈에 띄는 한 승객.
백발의 머리에 동그랗게 굽은 허리, 당신에게 어울리는 세 발 지팡이.
한 74세쯤 돼 보이는 할머니께서 어렵사리 미리 간이석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눈이 마주친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전주가 고향이세요? 혹시 병원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
.
지금 생각해 보니 난 정말 편견이 많다.
나에겐 서울-지방 이동 노인 고객이면 ‘1. 아들딸 집 다녀오기, 2. 서울 병원 다녀오기’라 인식한다.
나의 질문이 어색하게 돌아오는 할머니의 말
“혼자 전주 여행 가요~!”
.
.
‘오 이런 혼여행이라니!’
마치 무전기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받았다.
(가끔 화나면 돌덩이 같은 무전기로 때리고 싶어서 하는 말)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정해진 답으로 배웅했다.
[정차역 발차 시간 : 역마다 1-2분 내에 정차시간이 있다. 가끔 조착하거나 승하차 손님이 많을 경우 더 대기하는 경우도 있다.]
길어지는 정차역 발차 시간에 할머니의 발걸음을 지켜보았다.
마중 나온 백인 부부, 흑인 아가씨.
할머니는 그들을 보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Hello! Good to see you! I missed you!”
함께 포옹하며 인사하는 할머니. 여행 메이트인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느껴진 것은 ‘창피함, 놀라움, 부러움 그리고 희망.’
단지 외적으로 판단했던 나의 편견에 대한 창피함.
영어로 소통하는 모습에 놀라움.
많은 나이에도 열정 있는 모습에 부러움.
그리고 ‘나도 그러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
한편으론 나의 편견을 무전기로 깨준 할머니 덕분에 어렴 풋이 생각했던 나의 70대를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상상해 보았다.
‘훗! 나도 10년에 한 번식 나마 외국어 마스터 하면 8개 국어는 껌이지!’
잠시 권태로움과 우울감에 빠져 열정을 잃은 나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나는 젊구나,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구나.
정작 70살이 넘어 그땐 내가 혼자 여행하는 멋진 할머니가 돼 있을지도!
내가 열차에 오를 땐 승무원에게 구황작물 하나쯤 손에 쥐어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