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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스라이팅 해방일지-(1)

 

by 뵤뵤리나 Feb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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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 안에 쥐라는 게 이런 기분인가. 돌덩이가 짓누르는 듯한 가슴을 모른 척 내버려 두고는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급히 의자를 박차고 자리를 떴다.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부여잡고 울어도 괜찮을 만한 곳을 머리 굴려 찾아본다. 호텔 로비고, 화장실이고, 정원이고 어디에나 고객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다. 문득 떠오른 곳은 주로 창고로 쓰여서 고객 접근이 제한된 직원용 계단이었다.


그곳을 향해 잰걸음으로 들어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터져 나오는 설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아이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음을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매달려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고 아이의 하원을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치 댐 붕괴를 온몸으로 막다가 기력이 쇠진해버려 물살에 함락당한 사람처럼. 

끅끅끅......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 수밖에. 

들키고 싶지 않은 울음소리를 꾸역꾸역 누르자니 가슴이 미어터져 버릴 것만 같다.


피폐해진 정신력을 부여잡고

그래도 버텨보자, 적응되면 나아질 거야.

잘 해낼 거야. 그럴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던 하루가 무색해진 날,

답답함에 난생처음 가슴에 멍이 들도록 주먹으로 내리쳤던 날,




나는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이러니까 내가 애 엄마들
안 쓰려고 하는 거야.
너 같은 애 때문에
워킹맘이 욕먹는 거야, 알아?
너 이러면 편의점 알바밖에 못해.
평생 파트타임만 하고 살거니?


듣기만 해도 암을 유발할 듯한 독기 품은 말, 말, 말.

드라마에서나 한번 들어볼 법한 대사들은 모두 내가 몸담고 있던 직장의 임원이라는 인간이 바로 눈앞의 내게 퍼부은 말 같지 않은 말들이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과 발생 시 그 조치'가 취업규칙의 필수 요건으로 지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여전히 이런 식의 언어폭력이 행해지는 곳에 1년의 공백을 깨고 재취업을 했다.


또다시 경단녀가 될까 두려움과 조급한 마음에 이력서를 넣었고, 일단 출근 시작.





 객실 체크인으로 분주하던 오후 3~4시쯤이었나, 프런트에서 급히 호출하길래 나가 보았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 선캡, 팔토시, 등산복, 전형적인 감귤밭 촌부의 행색을 하신 두 여사님. 시청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담당 공무원은 아니었다. 워낙 업장이 많다 보니 시청에서 파견한 대행사 직원들이었을까. 미납 요금이 있어 시설 점검을 나왔다고 한다. 입사 1개월 미만, 아직 이곳 C호텔 사정에 어두운 나로서는 북적이는 로비를 피해 사무실로 모시고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고, 이들이 주장하는 공과금 미납 건에 대해 소명을 해 줄 만한 그 누구도 사무실에 없었다.


그때 ‘그분’이 들어오셨다. 파견 직원들의 행색을 아래위로 스캔하는 날카로운 눈빛.

“어쩐 일로?”하고 나에게 묻는다. 사정을 듣는 동안 그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지금 시청에서 사람 나왔는데 너 요금 안 낸 거 있어? 일을 뭐 어떻게 했길래 이딴 것들이 찾아오게 만들어? 엉?”


갑자기 올라간 데시벨에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얼음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한순간 ‘이딴 것들’이 돼버린 파견 직원들도 심히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내가 너한테 돈 안 준 적 있니? 왜 요금을 제때 안 내서 내가 이런 독촉을 받아야 해?

너 나 몰래 해 먹니?”


뭘 해 먹는다는 걸까? 금전을 관리하는 직책으로선 심히 치욕스러운 말일 게 틀림없다. 그의 워딩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도 주옥같아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 고작 다섯 문장으로 세 사람의 인격 모독을 하다니, 일타 쌍피 아니, 일타 삼피가 이런 것일까?


“확인하고 연락 줄 테니까 나가세요.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시라고요!”


낙뢰같이 떨어진 불호령에 시청 파견 직원들은 그야말로 못 볼걸 본 사람들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허둥지둥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비난의 화살은 곧장 나를 향했다.


“리나 씨, 저런 꼬라지 한 사람들을 고객들 다 보는데서 프런트 뒤로 데리고 오면 어떡해? 센스가 그렇게 없어? 호텔 이미지 어쩌자는 거야?”


“아, 저는 그게……”


분노 버튼이 눌린 듯 화기 어린 말을 쏟아내는 상사에게 어떤 말을 한들, 말대답이나 변명으로만 비칠 것이리라.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억울한 입을 그만 꾹 다물어버렸다.

머릿속은 온통 내 잘못이 무엇일까 분석하기에 바쁘다. 그들을 번잡한 로비보다는 사무실로 데려와 자세한 얘기를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시청에서 나왔다고 하니 조금 겁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맞다. 프런트말고 바깥에 사무실 후문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했나.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센스가 부족했네.’


그때는 미처 눈치를 챙기지 못한 신입으로서 저지른 판단 실수와 부족했던 순발력을 자책하는 것으로 스스로 마무리지었다. 물론 물음표는 있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대로할 일인가? 이런 방식의 꾸중이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훗날, 그의 분노 버튼이 눌러진 이유를 이해할 만한 일련의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육지에 본사를 두고, 외지인들로만 꾸려진 경영진들, 시청으로 접수된 정체불명의 민원들과 잦은 불시검문, 순조롭게 떨어지지 않는 관공서의 허가들. 운영하는 내내, 수월함 하나 없이 척박하기만 한 모든 상황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나?

https://brunch.co.kr/@byobyolina/49




그럼에도,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거기에 있던 모두가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는 소통 과정에 오류가 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게 본인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해서 힐난하며 상대의 존엄을 깎아내릴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인지 묻고 싶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직원들을 혼내는 방식은 늘 내 예상 범위를 벗어났다. 저런 직장 상사가 실존한다고? 에이, 설마. 뉴스로만 보던 직장 내 언어폭력을 목도한 날마다 퇴근 후에도 후유증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말로 상처 주는 자, 그 말이 본인에게 돌아와 비수가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다. 다른 직원들이 혼날 때조차, 호통 소리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키보드 위에 손끝은 덜덜 떨리곤 했다.


각기 다른 실책으로 혼나는 직원들의 대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애처로운 유형.

아래로 내리깐 눈과는 달리 뻣뻣이 쳐든 고개와 뒷짐 진 자세로 소심한 반항의 액션을 취해 보는 당돌한 유형.

순종적인 자세로 경청하되, 사무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숫자 욕을 읊조리는 포커페이스 형 등등.


그들의 공통점을 굳이 꼽자면, 꾸중 들을 때 하나같이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는 것이랄까. 탈곡기처럼 탈탈 털리는 멘털을 부여잡으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차피 다음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언보다는 노여움을 감당할 수 없어 내뱉는 욕설과 비난의 비중이 더 높았으니 말이다.


이처럼 열을 내고 과격하게 혼쭐을 내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의 당위성이 있었다. 호텔의 번영과 이익을 위해 요즘 MZ 직원들의 나태하고 방만한 직업의식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을 은연중에 하곤 했다. '라떼'를 시리즈 별로 언급하며 혹독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80, 90년대 산업 역군스러운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다. 회사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기대한 그와, 포괄임금제로 묶여 야근과 휴일 근무에도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하는 MZ 직원들과는 입장 차이가 커 보였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이다. 상급 관리자들과 거래처 대표들도 주눅 들고 쩔쩔매는 마당에,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미생 직원들은 각자 해야 할 일만 숨죽여 해내고 있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현장 소장님께 고초를 토로할 수 있던 이전 직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극히 불행히도, 이곳에서도 대부분의 자잘한 일들이 나를 거쳐야 했다. 위치마저 일 떠넘기기에 최적화된 사무실 입구 문 앞에 자리한 총무.


직원들은 문턱을 넘나들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입사 2개월 차 경력직 대리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도 모르는 답을 찾아서 들려줘야 했기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보다 호텔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전후 사정을 몰라 질문하러 다녀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답답한 마음에 의견을 내면 그 일은 이상하게 내 차지가 되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응답하느라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다 돌아오면 책상 위 수북이 쌓여있던 서류들.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왜 전임자들이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는지를.

매일이 고비인 것처럼 일하니 달이 1년처럼 느껴진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내게도 핵폭탄급 불똥떨어지는 날이.






대문사진 출처: UnsplashAditya Sax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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