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프리스타일.
아침부터 아내가 분주히 움직인다.
여행을 시작하니 파워 J에다가 파워 E가 되어버린 아내는, 7시에 로봇처럼 기상해서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6시 반~7시 반에 일어나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2시간의 시차가 있는 이곳에서는 5시 반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너무 늦었나!?' 하면서 말이다.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나는 베란다에 앉아서 가만히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반팔 반바지가 맞는 건가. 따뜻한 날씨인데 습하지 않은 게 실화인가. 자동차 소리가 아니라 새소리로 잠에서 깨는 건 너무 신선놀음이 아닌가- 생각했다.
옆 건물 지붕을 보는데 비둘기가 고고하게 앉아있는게 아닌가. 우리나라 비둘기와는 다르게 날렵해서 길바닥이 아니라 건물 지붕까지도 너끈히 날아다닐 수 있는걸까?. 비둘기가 과식할만큼 주정뱅이들이 없는 도시겠거니- 이 도시를 추측해나갔다.
준비를 마치고 조식을 먹으러 나왔는데, 호텔 직원분들은 참 친절하다. 심드렁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수많은 질문에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내가 궁금해한 건 시내 가운데 있을 것으로 보이는 초대형 나무에 대한 내용이었다. 거리가 최소 100m 이상은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도 엄-청나게 크게 보이는 나무의 크기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직원분의 설명으로는 500년 된 나무이고, 매년 11월에 풍등 축제 같은 것을 하니 그때 또 구경 오라는 것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대화의 전개가 그를 호텔 매니저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그 나무를 직접 가서 봐봐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모든 멋진 풍경은 카메라로 담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저 웅장함이 왜 카메라로는, 바로 옆에 있는 평범한 나무를 찍은 것처럼 보이는 걸까나-
2일 차 치앙마이 여행의 첫 일정은 숙소 바로 근처에 있는 사원이었다. '왓 페디 루앙'이라는 사원인데 올드타운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1인당 100바트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온통 황금색으로 칠해진 사원과 화려한 색과 장식으로 조각된 벽면과 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와 함께 들어가서는 마치 잠실역에서 롯데타워를 올려다보듯이 고개를 90도로 뒤로 꺾어 천장을 바라봤다. 사원의 천장뿐만 아니라 코끼리들로 둘러싸인 높은 탑도 고개를 90도 꺾었어야 했다. 꽤나 멀리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도, 그 웅장함이 전혀 담기지 않고 그저 눈으로만 담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새로워서 천천히 둘러보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원을 돌다가 나왔다. 2일 뒤에 다시 한번 방문해서 천천히 음미하지 않았더라면, '왓 페디 루앙'을 가봤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훑고 나왔던 날이다.
아내는 치앙마이에 오기 전에 유튜브 등을 통해 아주 단단히 계획을 하고 왔다. 그래서 우리의 다음 스텝을 KALM이라는 예술가들의 공동체(?) 구역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치앙마이의 인도는 정말 좁았는데, 반대편에서 마주 보며 걷는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차도로 내려와서 걷는 게 나을 정도였다. 분명 구글 지도로는 20분 걸어가면 되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야 하다 보니 40분이 걸리는 기적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는 다양한 사원들이 있어 내키는 대로 사원을 들어가곤 했다. 여러 조각상 중에 눈에 띄는 조각상이라고 한다면 환상 속의 동물이나 존재를 조각상으로 만들어 놨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에 하반신은 용이라던지, 닭의 상체를 가지고 코끼리의 하체를 가지고 있다던지- 하는 것들이었다. 내 첫 조카가 지금 9살인데,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에 포켓몬스터 같은 환상의 동물들을 올려둔 게 생각이 났다. 잼민이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드니, 조카와 함께 왔어도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어머니/자식 커플 세트로 돌아다니시는 분이 많이 보였다. 마침 나이대도 7~9살 정도 되는 조용히 잘 따라다닐 것 같은 애기들이었다.
KALM에 도착하니 인사동과 성수동을 방불케 하는 신식 건물이었다. 각 예술가 가문들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문양들과 전통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격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어서 그런지, 그것들이 비싼 건지 싼 건지도 잘 이해되진 않았다. 다만 굳이 '이걸' '여기서' '이 가격'에? 라는 머릿속 큰 물음표가 단단하게 떠올라있었다.
아내의 전언에 따르면 치앙마이는 커피로 유명하기 때문에, 1일 2 커피에 라떼는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난 라떼는 입에 대지 않는 편이고, 의외로 에스프레소 더블을 마시는 편이다. 하지만 난 두말없이 아내의 말을 이행하기 위해 KALM 뿐만 아니라 다른 카페에서도 라떼를 시켜서 맛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한 번도 라떼를 시키지 않았고 더티 커피부터 각 카페의 시그니처 커피를 주로 주문했다. (???)
거품도 풍부하고 우유의 고소함이 커피의 원두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롭게 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신식의 공간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맞으며 라떼를 먹으니 아직은 이곳이 태국 같진 않았다. 다만 같은 공간에 있는 손님들의 인원 구성이 한국의 카페 같지는 않았을 뿐이다.
한참 시간을 보내고 2층의 Library라는 곳을 올라가 보았는데, 치앙마이는 참 소소한 곳에도 조각과 장식을 많이 해놓았구나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마저 손잡이와 나무 발판에 촘촘하게 음각-조각이 빼곡했다. 마냥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만든 이의 고충과 고단함이 먼저 떠올랐다.
치앙마이에는 1달 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편안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5일짜리 여행이라 빠듯했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멍-한 날도 진정한 여행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길거리가 보이는 오픈형 바에서 맥주와 함께 땀을 흘리며 죽-때리는 것이면 몰라도, 빵빵한 에어컨 밑에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싶진 않았다.
오전에 참 많은 일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출발했다.
이번에도 아내가 저장한 '치앙마이에서 꼭 먹어야 하는 존맛탱 맛집' 순위에 있는 가게였다. 유투버 및 블로거들이 추천한 가게들인데, 그들은 표현을 항상 '인생 최고', '치앙마이 필수' 이런 식으로 평범한 독자들을 꼬시는 것 같다. 구글 지도를 보며 찾아간 가게는 태국식 고기국수를 파는 '블루누들'이라는 가게이다.
한국인이 바글바글한 여행지는 지양하고 싶은 내 마음만 고수할 수는 없는 것. 심지어 줄까지 서있는 가게였는데, 대기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말이 넘쳐났다. 10여분을 대기하고 들어간 가게는 오픈형형 가게였는데, 건기라서 그런지 벽이 따로 없이 천막에서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많이들 시킨다는 메뉴를 시키고, 이곳에 오면 필수적으로 시켜야 한다는 차이티 라떼도 주문했다. 꽤 준수한 맛에 국수와 고기의 상태가 매우 조화롭기는 했지만, 유투버들의 호소처럼 '이곳을 반드시 들러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종업원들이 효율적으로 분업해서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태국스럽다'가 아니라 '한국인이 많이 올만 하겠는걸?'싶은 생각이 들었다.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갈길이 바쁜(?) 우리는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 길이 바쁘다는 건 한정적인 여행기간 동안 아내가 계획한 '먹을거리'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를 보아하니 아내가 가보고자 싶었던 카페와 디저트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소화시킬 겸 걸어간다면, 얼마 전에 커피를 마시고 고기국수를 먹었지만 디저트를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계획했던 카페 근처에 가자, 아내가 예상했던 크기(?), 감성(?)이 아니었다. 굳이 느낌이 오지도 않는데 계획했다고 지켜야만 하는 것 아니다 보니 다른 곳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데 작은 골목 모퉁이에 잠깐 앉아서 열대과일들과 코코넛 워터를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 매우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감성이지!'
max 5명밖에 앉지 못할 가게의 벤치에 앉아 주문했고, 너-무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 마침 햇살도 강렬해진 터라 피해있을 곳이 필요했는데, 치앙마이 첫 과일까지 먹은 것이니 너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망고와 파인애플, 사과만 슴벙슴벙 썰어서 코코넛 쉘 볼에 담아서 요거트를 살짝 부어주었는데, 너무 극락인 맛이었다. 이후에도 망고를 비롯하여 많은 열대과일을 먹긴 했는데 먹을 때마다 대대대대 만족했다.
이후 계획했던 일정들이 생각보다 한참 뒤에 해야 할 것들이라 우리는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다음 일정이 저녁에 야시장에 가서 저녁을 먹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배도 너무 부르고 오후 2시 반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발 마사지 샵에서 마사지를 받고, 근처 전통시장에 가서 과일 좀 사서 시내 정중앙에 있는 우리 숙소에 돌아가 좀 쉬다 나오는 걸로 결정했다.
말 그대로 요거트를 먹은 가게 바로 옆에 있는 마사지 샵을 들어갔다. 그래도 아침부터 꽤 걸어서인지 딱 발마사지 받으면 좋은 몸상태에 놓여있었고, 33도까지 올라가는 대낮의 더위를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피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다. 지나고 보면 강도도 약하고 별일 없는 마사지였지만, 그때 그 순간에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나는 혹시나 잠이 들면 대충 해주지 않을까-하는 우려에 졸린 눈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와이프는 육체에서 로그아웃한 것처럼 곤히 잠에 빠져있었다. 더욱 발마사지 받으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후에 개운해진 몸으로 솜펫 시장을 향했다. 가는 길에 기념품 샵에 들러 내가 여행동안 입을 옷을 좀 둘러봤다. 흰 티셔츠만 몇 개 가지고 온터라 현지식 착장을 입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끼리를 표현한 디자인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중 가장 깔끔한 셔츠를 골랐다. 어쩌다 보니 5일 여행 중에 3일을 입고 다니게 되었는데, 대 만족하면서 입고 다녔다.
솜펫 시장에서는 아내가 사전에 알아놓은 '솜펫 시장 내 최고 맛집 과일가게'이 들렀다. 환전소 옆에서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곳이라는- 개략적인 정보만 알고 갔는데, 소문 그대로였다. 위치가 소문 그대로였다는 뜻이다.
조금 전에 망고 등을 너무 맛있게 먹은 지라, 망고 3개와 망고스틴 한 봉지를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도착하자, 이곳을 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에 평안을 주는 공간이라니. 심지어 올드타운 여행 중에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접근성까지 갖추고 있다니... 최고의 숙소라고 칭하고 싶어졌다. 아내와 2시간만 눈을 붙이고 야시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쉬더라도 숙소 내 수영장에서 선베드 위에 누워 과일을 먹으며 쉬고 싶다고 제안했다. 아내도 동의하고 함께 망고와 망고스틴, 혹시 몰라 수영복을 들고 수영장으로 갔다.
대형 리조트의 수영장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높게 솟아있는 나무들로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따뜻한 날씨 아래 꽤나 차가운 물은 나에게 굉장한 만족감을 주었다. 딱 3번만 입수하여 수영했는데,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더위가 가신 데다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선베드에 누워 과일도 먹고 따뜻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휴식시간을 가지니, 이것이 신선놀음이구나- 하며 웃었다.
하루가 이렇게 가득 채워진 것 같은데도, 우리에겐 2일 차 저녁시간 계획이 남았다.
눈 좀 붙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