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 블라 미문학사

10화 모던한 모던주의

by 개똥이엄마

앞서 9화에서 얘기한 20세기 자연주의와 함께 미국의 모던주의 역시 미국문학의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인데, 모던주의(modernism)는 일단 과학에 기반했던 자연주의를 밑바탕에 깔고 시작한 사조이다.

사실, 모든 문학 사조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사실주의, 자연주의, 모던주의다,라고 깔끔하게 정의하기는 힘들다.

몇 줄기로 나뉘어 같이 흐르기도 하고 뒤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사조는 한 시대 사람들의 여러 가치관이 존재하는 세대차이와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모던주의가 조금 더 다르다면 전통과 구성을 많이 벗어났다,라는 점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전쟁이었고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대강 요약하면 1차 대전(1914-18년) 당시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 무기 공급만으로도 짭짤한 정도, 그 이상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구경만 했을 뿐이다.

1차 대전 중 1917년 독일은 물자부족으로 허덕이다가 결국 유럽으로 들어오는 모든 상선들을 무차별 폭격해 버렸다. 그 바람에 여객선에 탔던 미국인이 100명 이상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선이 아닌 여객선을 격침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로 당시 사람들의 온갖 추측이 만무했고 또 영국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모종의 사건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미국에서는 전쟁 참전을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이에 미국은 전쟁 막판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가세에 결국 1차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패전으로 붕괴직전까지 몰렸고 이것은 나중에 2차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한편 미국이 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등 에게 팔아먹은 물자와 전쟁 자금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군수 기업과 은행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국민들에게 돌아간 세금 부담, 또 수십만 군인들의 희생이 대가가 되었다는 것, 결국 국가와 기업, 은행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미국 사회의 혼란을 더욱더 가중시켰다.

전쟁을 이끌어낸 기성세대의 정치적 비판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기존 체제를 믿지 못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이러한 불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대가 이러고 보니 문학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참상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자 및 예술 청년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미국에 있지 못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허무하지만 쾌락을 좇으며 지냈다.

전쟁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국은 물질만능주의로 만연했고 잃어버린 세대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럽에 머물며 이들은 삶의 회의적인 태도를 문학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핏제랄드(Scott Fitzgerald) - 그 유명한 위대한 게츠비를 썼다.-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있다.

특히 이들이 머무르며 토론의 장을 열었던 파리의 카페, '라 로통드' , '르 셀렉트', 가 있으며 지금도 남아있다.

이들 중에서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헤밍웨이는 기자 생활을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대표작만 살펴보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1926)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

사실 거의 모든 작품이 허무주의 색깔이 짙다.

또 헤밍웨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 hard boiled style(하드 보일드 스타일) 계란 완숙의 뜻이 아닌 냉정, 건조, 등 문학적 의미로서 감정 이입 없는 문체를 말한다.

술 없이 잠을 청해야 하는 불면의 요즈음, 노인과 바다 오디오 북을 머리맡에 틀어놓고 이십여분 듣다가 잠들면 딱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마냥... 별일 없다. 기복 없이... 감정 없는... 보름동안 두 번 완독? 이 아닌 완청을 했다.

헤밍웨이 작가를 떠올릴 때 나에게만 항상 같은 연결고리 안에 있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는데, 헤르만 해세의 데미안을 한국어로 번역한 전혜린(1934-1965) 작가가 있다.

전혜린의 유고집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년), 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읽기를 반복했던 책이었다. 특히 딸에 대한 애정과 육아 이야기로 인상이 깊었는데, 헤르만 헤세 작가로부터 받은 엽서이야기가 자주 등장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읽은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와 우리나라 작가, 전혜린과의 연결이 실제 존재했었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현재 우리나라 105세 최고령 철학자 김형석(1920년~) 님이 고(故) 윤동주(1917년~1945년) 시인과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다는 것만큼 신기한 일이다.

아무튼 이미 알고 읽긴 했지만 1965년,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지라 사춘기 시절 나름 애틋한 감정이 있었던 작가였다.

헤밍웨이도 이보다 몇 년 전인 1961년 7월에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두 작가 모두 허무라는 공통된 고리가 있다. 두 작가가 벗어나지 못했던 허무의 끝은 지독한 외로움과 무서움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두 작가 삶의 끝을 먼저 당겨오게 했다,라고 생각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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