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을 만나 직장 생활의 고충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합리적인 척하지만 결국 자신의 경험만 고집하는 상사, 퇴근 없는 업무 지시와 부당한 대우,
무엇보다 자신의 노력과 역량이 납득할 수 없게 저평가받을 때 청년들은 깊은 무력감과 피로를 호소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마음 한구석에서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직장 생활이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뻔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러나 코칭에서 배운 대로 그저 들어주기만 해야지 하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결국 해결책을 쥐여 주고 싶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은 조급함에 어설픈 위로의 말들을 쏟아 냅니다.
지쳐 있는 그들에게 나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
그 질문을 안고 위로(慰勞)라는 단어 찾아 보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로할 위(慰)는 다스릴 위(尉)와 마음 심(心)이 만난 글자입니다.
다스릴 위(尉)는 본래 뜨거운 다리미 같은 것으로 구겨진 것을 눌러 평평하게 고르는 행위에서 왔습니다.
상처받고 구겨진 마음, 불안으로 요동치는 마음(心) 위에 따뜻한 손을 얹어 천천히 펴주는 것.
그것이 ‘위’입니다.
위로의 위(慰)는 — 요동치는 마음을 다독이는 손길입니다.
로(勞)는 불 화(火)가 두 번 겹치고, 그 아래 힘 력(力)이 더해진 글자입니다.
위아래로 맹렬하게 불이 타오르는데, 그 속에서 남은 힘을 다 쥐어짜며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어 버린, 흔히 말하는 번아웃(Burnout)의 벼랑 끝에 선 모습입니다.
수고할 로(勞) — 두 곳에서 타오르는 불을 견디는 상태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버린 사람 곁에 조용히 다가와, 그 요동치는 마음 위에 말없이 따뜻한 손을 얹어주는 것.
그것이 한자가 말하는 위로(慰勞)입니다.
나함(נָחַם) —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다
성경이 말하는 위로의 깊이로 들어가 보면, 이 장면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위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함(Naham)입니다. 이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강하게 숨을 쉬다, 깊은 한숨을 내쉬다'입니다.
누군가에게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 곁에 앉아 그가 쉬는 깊은 한숨을 나도 함께 내쉬는 것입니다.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공감의 호흡이 곧 성경이 말하는 위로의 뿌리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성령님을 일컫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Para) 부름받은(Kaleo) 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앞서서 끌고 가는 자도 아니고, 뒤에서 밀어붙이는 자도 아닙니다.
정확히 내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걸어주는 존재입니다.
해결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일
청년들에게 자꾸 말이 많아졌던 건, 그들의 문제를 진짜 해결해 주고 싶어서라기보다 '내 쪽에서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줬다'는 저 자신의 만족과 안도감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로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타버린 재 곁에 그냥 함께 앉아주는 것이며 가르치려 들지 않고, 함께 깊은 한숨을 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친 사람들에게 10단계의 문제 해결책을 내밀지 않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짐을 당장 없애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이 아니라, 그 무거운 상태 그대로 내 곁으로 오라는 '존재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위로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정답 대신 그저 당신의 곁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청년들 앞에 앉아 이 진짜 위로를 다시 배워야 했던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곁에서 섣부른 정답을 거두고 그의 깊은 한숨을 함께 쉬어주는 진짜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