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의약분업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동네 약국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습니다.
약사 선생님과 상담을 마친 환자들이 조제약을 받으면, 제가 비용을 계산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노인 환자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접수증에 적힌 이름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이라면 쉽게 짓지 않을 이름들이었습니다.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며 학식을 쌓을 겨를이 없었던 부모님들이, 자녀의 이름 한 글자를 깊이 헤아릴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름 하나로 놀림의 표적이 되는 아이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었겠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쌓였을지,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이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평생 불리는 것. 피할 수 없는 것.
현대는 이름을 산업으로 다룹니다.
브랜드 전략 부서가 따로 있고, 기업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비자의 기억에 새기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쏟습니다. 이름 하나가 회사의 가치를 만들고, 상품의 운명을 가릅니다.
이름이 존재의 값어치를 매기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본래 무엇일까요.
名 = 夕 + 口
저녁 석(夕) —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입 구(口) — 말로 자신을 밝히는 것
저녁의 입.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밝히는 목소리.
전기가 없던 고대 사회에서 칠흑 같은 밤이 내려앉으면, 바로 앞에 선 사람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인기척이 느껴질 때 사람들은 말로 자신을 밝혔습니다. "누구십니까. 저는 누구입니다." 이름의 유래가 거기에 있습니다.
군에서 야간 경계를 서던 기억이 납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면 총을 겨누고 그날의 암호를 요구했습니다.
암호가 맞으면 아군, 틀리면 적군.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그처럼 생사를 가르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름의 본질은 태어날 때 받은 글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에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얹어 말합니다.
저에게도 살아오면서 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상처처럼 불러버린 이름, 실패의 기억이 새겨진 이름, 스스로 포기하며 받아들인 이름. 그 이름들이 때로는 나를 통째로 정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들을 마지막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람(Abram)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아브라함(Abraham), '열국의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무언가 훌륭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새 이름은 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의 울림으로부터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는 사랑 노래인 줄만 알았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읽힙니다.
어둠 속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그 존재에게로 걸어가 곁에 서는 일입니다.
지금도 어떤 밤에는, 제가 스스로 붙여버린 이름들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집니다.
실패한 사람, 부족한 사람, 결국 거기까지인 사람. 그 이름들이 어둠 속에서 속삭일 때,
저는 그보다 먼저 불려진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을 자꾸 잊습니다.
나를 속이는 거짓 이름에 속지 않고,
그 어둠 속에서, 나보다 먼저 내 이름을 알고 계신 분이 지어주신 이름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넌 내 아들이다. 너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너는 가능성이다. 너는 특별하다.
너의 존재만으로 내가 기쁘다라고 불려주신 그 이름을 기억하며 오늘도 살아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