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선과
그분의 섭리가 만나는 시간, 운(運)


약 20년 전, 자기주도학습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입학사정관제와 진로 교육이 대두되던 때라, 시대의 흐름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회라 믿었습니다.

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리더십과 비전을 강의해 온 저로서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밤 낮없이 학부모 설명회를 열고, 학생들을 모아 교육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설명회를 듣고 난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을까요?"라며 고개를 갸웃했고, 오랫동안 누군가 떠먹여 주는 공부에 익숙했던 아이들은 빈 책상 앞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시장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제게 그 시간은 깊은 무력감으로 남았습니다.


내 모든 노력이 부정당한 것 같았던 그 시절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는 질문 하나를 남겼습니다.


"인생의 성취는 과연 노력만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봐도 땀 흘린 만큼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며, 인생에서 '운'이 차지하는 자리를 크게 남겨두곤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이 운(運)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운(運),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올 때

운(運)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뜯어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길을 걷거나 움직이는 행위를 뜻하는 '책받침(⻍)'에,

거대한 수레나 군대를 상징하는 '군사 군(軍)'이 합쳐져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글자 안에 천체의 운행이나 역사를 이끄는 거대한 힘이 굴러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거대한 수레바퀴는 우리 삶에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어떨 때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오는 힘이라 느껴집니다.

또 어떨 때는 내 안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이 장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강력한 엔진이 되기도 합니다.


운은 바로 밖에서 밀려오는 섭리와 안에서 뻗어 나가는 의지가 맞부딪히는 그 길목에서 피어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 두 힘의 만남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이 그렇고, '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는

세네카의 통찰도 궤를 같이합니다.


하지만 실패의 끝에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성 어거스틴의 묵직한 권면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너에게 달린 것처럼 일하라."


이 짧은 문장은 모든 것을 은혜라 부르며 자신의 땀을 생략하려는 게으름과,

내 노력만으로 세상을 이겨보려 했던 제 안의 교만을 동시에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최선과 그분의 섭리가 만나는 오늘

예전에 '긍정(肯定)'이라는 단어를 묵상하며,

진정한 긍정은 그저 상황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꽉 막힌 장벽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태도라 적은 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내 소망과 사명을 품고 긍정의 발걸음을 내디디되,

그 발걸음의 끝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와 맞닿기를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자기계발서도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돕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거대한 수레를 움직여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나의 작은 땀방울이 무의미하게 증발하지 않도록,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삶의 수레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선과 그분의 거대한 섭리가 만나는 오늘, 우리는 또 한 번 은혜라는 이름의 기적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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