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낭만술집 달빛주점'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본 작품의 모든 삽화는 하늘나루의 창작물입니다.
'지금 그 말 사실이니?'
우리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습니다. 환영회 날 처음 본 제인이 털을 날리며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제인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소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서경이 얼버무렸습니다.
'이래도?'
제인이 발에 든 배지를 가리켰습니다. 거긴 분명 '하나고등학교 2반 김서경'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싹싹 빌기 시작했습니다. 제인이 우리를 잡으러 왔던 독수리와 까치에 알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요.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돼. 혹시 돈이 필요하니? 돈은 얼마든지 있어.'
제인은 새하얀 머리를 털며 한참 웃었습니다. 그 모습도 다현과 비슷했습니다.
'누구한테? 얘기해 봤자 나한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그렇지만 엄청 흥미로운데. 혹시 우리 동아리방에 와 보지 않을래?'
저는 서경에게 속삭였습니다. 이 시간에 저렇게 돌아다닐 정도면 분명 열심히 사는 학생일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저희는 조용히 제인을 따라 아주 낡은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더 허름했습니다. 하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벽에 마치 새집처럼 생긴 동아리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달빛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거기로 들어갔죠. 분명 한낮이었지만 마치 밤 12시처럼 활기찼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그나마 꿈이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있을 게 분명했습니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동물은 드무니까요.
'저기야'
제인이 앞발로 꼭대기에 달린 오두막을 가리켰습니다. 달과 은하수 색 페인트로 장식된 오두막이었죠. 지붕 꼭대기에는 금으로 된 지구본이 달려 있었는데 실제 지구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마치 홀로그램처럼 생긴 투명한 지구본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와, 진짜 크다.'
'지금은 낮이라 아무도 없어. 다 자는 시간이니까. 저기 있는 지구본이 우리가 꿈꾸는 프로젝트야.'
제인이 버튼을 누르자 지구본 위에 점이 여러 개 나타났습니다. 세계 각지에 있었지만 유독 한국, 그것도 서울 강남 근처에 몰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들어온 그 산 근처에 말입니다. 확실히 이 호랑이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이건 우리가 여우와 인간 전설을 분석해서 실제로 추정한 위치야. 물론 신화일 뿐이지만. 하지만 생각해 봐, 정말로 인간 세계가 있다면 분명 지리학계에 큰 획을 긋지 않겠니?'
제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도 크게 울부짖으니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상자들은 뭐야? 왜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서경이가 말했습니다.
'아, 학교랑 경찰이 우리가 하는 일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더라고. 이런 건 거짓 자료라면서 우리가 모은 걸 거의 다 가져기가 도 했어. 어차피 신화, 전설일 뿐인데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원. 그래서 못 가져가게 자물쇠를 채우고 숨겨 두었지.'
'혹시, 그 경찰 중에 독수리도 있었니?'
'우리 학교 경찰대 출신인데 여기선 아주 유명해.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쩐지 난 별로더라. 혹시 아는 사람이니?'
우리는 무어라 말하려 했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일이 커지면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대신 우리는 달고기를 잡으려는 계획을 말했습니다. 제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방이 떠나가라 포효했습니다. 계획이 마음에 든 눈치였습니다.
'당연히 좋지.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는걸. 하지만 연예인 정도는 되어야 미끼로 쓸 꿈이 나올 텐데, 난 보잘것없잖아. 그런 희귀 물고기는 아무한테나 오지 않는다고. 어쩌면 내가 만든 발명품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리.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정도면 충분해. 우리가 필요한 건 한 마리가 전부거든.'
제인은 그 날카로운 앞발로 종이를 찢고는 안의 내용물을 꺼냈습니다. 가 보니 달빛 반사경, 호랑이 먹이를 비롯해 약간의 지도가 있었습니다. 제인은 그걸 다 가방에 구겨 넣고는 말했습니다. 그 순간 천장에 달린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흥할 흥(興) 자 네 개가 모인 글자. 분명히 다현이 보여준 그 글자였습니다.
'제인, 저 글자는 뭐야?'
'저거? 강남 구석에서 발견한 종이에 적혀 있었던 거야. 신기해서 가지고 왔지. 아무튼 서두르자. 인천으로 가는 비행선이 30분 뒤에 출발할 거야.'
늦은 낮, 시 정부 사무소. 금으로 뒤덮인 집무실에 용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로 두 개의 지구본을 만지고 있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누구냐? 난 휴식 중이다. 급한 일이 아니면 돌아가라.'
용이 소리쳤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두 쌍의 흰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접니다. 그 침입자들에 대해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독수리였다. 그의 진짜 이름은 팔수스. 자리에 앉은 용도 경계를 풀었다. 그는 용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다. 형식적으로는 경찰이지만, 숨어 지내는 용을 대신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일등 보고관(報告官)이다. 부하들은 물론이고 구 사무소장이나 군무부장도 그에게는 속수무책이다. 그가 밀고하는 날에는 그들도 바로 감옥행이기 때문이다. 팔수스는 시황실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이다.
'새로 잡아온 침입자들은 도망갔는가?'
'아직입니다. 시 사무소에 첩자가 있어 그리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추적관을 심어 두었습니다.'
'추적관이라, 처음 듣는구나. 이름은 무엇이냐?'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비록 젊지만, 저희 사무소에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입니다.'
독수리, 아니 팔수스는 조용히 집무실을 떠났다. 용은 다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잠에 빠져들었다. 달빛이 약한 날에는 그도 집무실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을 빼앗아 쓰느라 기력이 많이 쇠한 모양이었다. 그는 건물 뒤의 회의실로 조용히 걸어갔다. 용족들과 다른 동물들이 모인 의회장이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새로 들어온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지구본을 열자 사진 한 장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보낸 첩자입니다. 가만히 두면 우리에게 큰 해를 입힐 것이 분명하니 꼭 체포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첩자라는 증거가 있나요? 그런 식으로 시황 자리를 지키려는 의도가 아니고요?'
갈매기족 대표가 말했다. 그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은 용족들이 대대로 권력을 차지한 것에 대해 늘 불만이었다. 그들이 단체로 항의하자 용도 그만 기가 죽어 쩔쩔매었다.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지 않으면 그도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다행히도 그에겐 보고관 팔수스가 있었다. 그가 물증을 확보하면 의원들도 어쩔 수 없다.
'장(張)은 참 바보 같아. 처음 왔을 때도 12시에 일어나지 뭐니. 구 사무소였으면 이미 출근하고 점심 먹을 때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여기 생활이 전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야.'
비행선이 열심히 프로펠러를 돌리며 가는 동안 제인과 서경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제인은 자신이 친하게 지내는 한 호랑이에 대해 말했고, 서경은 저에 대해 무어라 열심히 말했지만 제가 갈 때마다 저리 가리고 손짓했습니다.
서경은 제가 얼마나 늦게 일어나는지, 숙제는 얼마나 대충 하는지 열심히 말했지만 딱히 말릴 방법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비행선 바깥으로 나가 풍경을 구경했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라 이럴 때면 늘 겉돌기 쉬웠죠. 저러다 다 불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삼십 분 정도 지나자 다른 인천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른 인천은 사실 도시라기 보는 거대한 배들의 집합체에 가까웠습니다. 배 위에 높다란 집과 건물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줄로 된 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그리로 드나들었죠. 구석에는 깔끔한 신식 배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아주 높다란 석조 탑이 있는 배였습니다. 다 범선인데 홀로 증기를 뿜고 있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저건 송도 신도시입니다. 시정부에서 야심 차게 건조한 배인데 요새 경기가 나빠서 파리만 날리고 있죠. 저기 커다란 탑은 무역회관, 3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주 반짝거립니다. 물론 앞에 호수공원도 예쁘고요. 외국 손님들 오라고 만든 건데, 어째 집들만 가득하답니다.'
비행선 승무원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인천 공항이 생각나 물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인천 공항? 공항이 뭐죠? 그런 건 처음 들어 봅니다. 대신 하늘나루가 있죠. 외국으로 떠나는 8층 비행선들이 인천 하늘나루로 들락거리니까요. 이런 비행선하고는 비교도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에어스팀 사에서 새로 만든 비행선을 봤습니다. 그건 10층이었지만 두 개가 연결되어서 20층짜리랑 같아요. 안에는 수영장, 연회장, 심지어 공원까지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큰 비행선은 처음 봤습죠. 마침 저희도 그리로 가니까 손님도 자세히 구경해 보세요. 정말 굉장하답니다.'
승무원이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습니다. 하늘나루라, 이 세계에서는 공항 대신 그런 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충돌! 이러다 무역회관에 충돌하겠습니다!'
망루 위에 있던 승무원이 외쳤습니다. 저와 이야기하던 승무원도 다급하게 떠났습니다.
'손님, 객실로 돌아가세요. 이건 소형 비행선이니까 최악의 상황이라도 천천히 떨어질 겁니다.'
저는 객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서경이만 홀로 떨고 있었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습니다.
'제인은? 제인은 어디로 갔어?'
서경이 조종실을 가리켰습니다. 우리도 짐을 챙겨서 조종실로 향했습니다. 제인은 그 성격만큼이나 행동도 빠른 것이 분명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무역 회관은 아직 저 멀리 있지 않나요?'
제인이 외쳤습니다.
'누군가 기체 탱크에 구멍을 냈어요. 이대로 가다간 방향을 바꾸기 전에 회관이랑 부딪히고 말 겁니다. 빨리 탈출 준비를 하세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