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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함

by JUNO

세컨비자를 따기 위해 퍼스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를 왔다. 총 3번의 비행기 탑승을 하고 호주에서 호주가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막막한 생각을 하며 잘 안 풀릴 것 같은 망상만 했다.

6개월 넘게 살던 집을 치우고 집주인분께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깨끗이 치우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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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에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이를 아득아득 갈며 지냈던 방이다. 참 많이 깨닫고 많이 다친 나와 함께한 방.

벽면에는 노란색 포스티지로 영어 단어, 하루 일과를 적어 지저분했는데 때고 다시 보니 이렇게 깨끗한 곳이구나를 다시 느꼈다.

노란색 포스티지로 벽을 채우며 느낀 건 이렇게 해도 영어 실력이 뛰어나게 늘진 않는구나.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실력은 장기간의 마라톤처럼 몇 년이 지나야 느낀다를 다시 느낀다.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내가 벌고 싶은 돈은 정말 장거리 싸움이구나를 또 느낀다.


무튼 퍼스에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시골로 왔다.

집이 좀 허물어 보였다. 영어가 미숙한 베트남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 홀로 한국인이다. 히터가 없고 화장실 옆 보일러실에 침대를 두고 사는 거라 정말 싼 값에 살고 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첫 출근에 나섰다. 정말 바빴고 장시간 쉬다가 일을 하니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일 하기가 싫었다. 왜 일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날 잡아먹었다. 차를 사기로 하고 부모님께 자랑까지 했는데 더 비싼 값에 다른 사람한테 팔았다고 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거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데 옆에 베트남 친구들이 먼저 말을 꺼낸다.

옆 친구가 자기가 일하는 식당에서 싸 온 음식을 건네고

삼성의 팬인 친구랑 퍼스 이야기를 한다. 너무 착해 보여서 의심 가득했던 집주인과 한국 여행 이야기를 한다.


순식간에 1시간이 흘렀다. 다들 열심히 사는 모습에 또다시 동기부여를 받는다. 이 1시간만큼은 명상을 하듯이 정말 '휴식'이었다.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일 하기 싫어 툴툴대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일을 하나 더 구해서 더 열심히 살며 내가 이루는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졌다.

부정적 에너지에 잠시 사로잡혔었나 보다.


순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베트남 친구들을 색안경 쓰며 바라본 나를 창피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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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국의 정이 가득했던 몇 십 년 전의 모습이 이런 모습일까?

내가 있는 세상이 이 세상이 아니듯이 내가 바라보는 그림이 남들과는 다른 그림이다.


기대는 안 하지만 담백한 맛으로 이번 도시를 맛봐야겠다.



같이 사는 친구들과 1시간가량 이야기하고 담백한 맛을 유지하고 싶어서 갑자기 글을 쓰게 됐습니다.

글을 쓰면 내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잔잔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네. 호주 어느 시골로 세컨비자를 따러 왔습니다. 최근 들어 정말 많이 날카로워지고 발톱 세운 고양이 마냥 세상을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호의가 이유 있어 보였고 만났던 사람들이 곧 끝나는 유통기한의 음식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제가 정말 날이 선 상태였더라고요.

몸이 고되다고 힘듭니까 몸은 힘들어도 정신이 건강하면 정말 행복합니다.

그동안 몸은 힘들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자극적인 요리만 당겼고 성공을 바라지만 자극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봤습니다.

이번 도시는 정말 담백한 맛으로 가고 싶습니다.

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일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주에 6일도 자신 있습니다. (7일은 생각해 보겠지만 기회만 있다면 한 번 해보는 것도..)

대신 제 목표를 향한 마음이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곡선을 크게 그리지 않으며 천천히 오르는 직선을 그리든 그냥 쭉 일자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과한 행복도 피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냥 작은 미소를 짓고 이 4개월을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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