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워보니
두 달에 한번 청정기를 점검해 주시는 코디분이 오신다. 벌써 3년 넘게 우리 집 청정기를 관리해 주시는 분이다. 청정기를 봐주시는 10여분의 짧은 시간에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이들 이야기, 시댁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정겹다.
오늘은 비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 비가 많이 오네요?"
"그러게요. 올해 비가 많이 온다는데 걱정이네요."
코디분이 더우실까 봐 미리 에어컨을 틀어놓았다.
"고객님은 벌써 에어컨을 트셨네요."
"네. 며칠 전부터 더워서 틀기 시작 했어요."
"저희는 아직 못 틀겠더라고요. 한번 틀면 계속 틀어야 할 것 같아서 더 버티려고요. 근데 이젠 장마도 시작이라 습해서 더 버틸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나도 한참 아이들 키울 때 여유 없이 쪼들리고 산 것이 생각이 났다. 그녀의 맘이 이해가 되었다.
얼마 전 딸이 한강축제 때 가서 다트 던지기를 하고 가져온 유아용 백팩이 있다. 그녀의 아이가 생각이 났다. 백팩을 보여주며
"혹시 막내가 몇 살이라고 하셨죠? 이 가방 얼마 전에 저희 딸이 한강축제 가서 따온 건데 막내 줘도 될까요?"
조심히 물어보니 그녀는 흔쾌히 좋아라 한다.
"우리 3호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아직 아기 같아서 주시면 좋아할 것 같아요."
그녀가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다. 가방만 딸랑 주기 뭣해서 딸아이가 간식으로 사다 놓은 젤리 한 봉 지도 가방에 함께 넣었다.
그녀는 중3, 중1,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있는 애가 셋인 엄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저희 1호가 오늘 학교를 안 갔다고 선생님한테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요. 에휴... 속상해서 정말... 지금 일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집에 가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에구... 속상하시겠다. 근데 애가 왜 학교를 안 갔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아프긴요. 어제 늦게까지 핸드폰 하더니 늦잠을 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아픈 게 아니라서."
"학교를 안 갔는데 큰일이죠. 전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될까 봐 걱정이에요."
예전의 내가 생각이 났다.
"집에 가서 애한테 "야~~"하고 소리 지르며 혼내고 싶죠?"
내 말에 그녀는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당장 달려 가서 소리 지르며 혼내고 싶어요."
"그러지 마세요. 학교 한번 빠졌다고 큰일 나지 않아요. 그럴 수 있어요. 살면서 늦잠 자고 학교 빠질 수도 있지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요. 애들 키우면서 더한일도 많아요. 안 아프면 됐어요. 우리 인생 길어요. 앞으로 아이들은 120살까지도 산다는데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냐... 요즘 책 좀 읽었다고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이왕 집에 가려고 맘먹었으면 근처 돈가스집에서 돈가스나 사가서 큰애랑 오붓하게 맛있는 점심이나 먹고 오세요."라는 설여사 말에
"고객님 말 듣고 보니 조금 진정이 되네요. 그래도 돈가스는 못 사줄 것 같아요." 그러며 그녀는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계속 못 해준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큰다고. 너무 야단치며 키우지 말라고. 아이에게 더 좋은 말 못 해준 게,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게 아이가 크고 나니 후회된다고.
설여사도 아이 둘을 30년 키워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다음날 아들이 자격증시험을 봤다. 시험장소는 차로 30분 정도 가야 하는 의정부다. 남편과 설여사는 시험장까지 아들을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시험을 치르는 3시간 동안 근처 사패산계곡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사패산계곡을 올라가니 성불사란 절이 보였다. 절에 올라가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길 기도하고 차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근데 차 안이 덥다. 창문을 열면 모기가 달려든다. 하는 수없이 계곡 중간쯤에 있는 카페로 갔다. 카페는 아늑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남편은 책을 읽고 나는 글을 썼다. 집중이 잘 돼서 좋았다.
아들 시험 끝날시간이 되어 카페를 나왔다. 설여사는 이 카페에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집에서 오기에는 다소 먼 거리여서 아쉬웠다.
시험을 보고 나온 아들은 차에 타자마자 시험에 떨어졌다며 속상해했다. 설여사는 아들에게 다음 시험은 언제 볼건지 물었다. 아들은 6개월 뒤에 다시 시험을 볼 거라고 했다. 설여사는 시험에 떨어져 속상해하는 아들에게 오늘 갔던 카페 이야기를 해주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다시 못 올 것 같아서 아쉬웠는데 아들 덕분에 다음 시험 볼 때에 그 카페를 또 올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제야 아들은 기분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그리고 다음 시험은 실수하지 말고 잘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잖아도 취업준비하느라 힘들어하는 아들인데 자격증시험에 떨어졌으니 시험장까지 데려다준 부모에게 민망하고 얼마나 속상할까 싶다. 그러나 살아보니 인생길더라. 지금이 아들 인생에 힘든 시기이지만 조만간 안정된 길을 찾으리라 믿는다.
자식은 부모의 믿음으로 큰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을 믿어주면 되는 것이다.
설여사는 아들이 인생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삶을 여유롭게 즐기기를 바란다.
인생은 길고 살면서 힘든 시기도 있지만 즐거운 일들도 많으니까.
그리고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 줄 수 있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