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범죄학 이야기:갈등이론과 비판범죄학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산업화로 인해 막대한 자본이 형성되고 있던 영국의 항 공장. 키 140cm도 안 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는 증기 방적기를 쉴세 없이 돌렸다. 하루 14시간. 손가락 몇 개를 잃고도, 빵 한 조각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배가 고파서 어른의 지갑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범죄자’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범죄를 흔히 개인의 문제로 본다. 도덕적 해이, 가정환경, 성격 문제까지. 하지만 비판범죄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묻는다.
“왜 이 사회는 그런 행동을 범죄로 규정했을까?”
“그는 왜 그런 선택밖에 할 수 없었을까?”
이러한 시선은 낯설지만, 점점 더 많은 국가(특히 유럽)들이 이 질문에 주목하고 있다. 특정 행위를 범죄라고 규율한 ‘범죄화’가 과연 정당했는지 되묻는 움직임, 이른바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라 불리는 흐름이다.
성매매, 간통 등의 처벌규정을 없앤다거나 일부 마약 소지나 흡입을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변화가 그 사례다. 범죄행위를 예방한다기보다, ‘범죄’ 분류에서 제외시킴으로서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시쳇말로 ‘기적의 논리’라고 조롱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들도 나름의 체계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뿌리엔 유럽에서 주로 발전한 비판범죄학(critical criminology)이 있다. 미국이 실증주의, 통계 분석 중심의 주류 범죄학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비판범죄학은 보다 철학적이고 구조적인 질문을 던지며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학계를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의심한다. 범죄는 나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흔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론적으로 가장 기초가 되는 건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이다. 갈등이론은 권력, 부, 지위처럼 모두가 원하는 자원은 희소하고, 희소한 자원을 쟁취하기 위해 집단 간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리고 법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더우면 윗도리를 걷어 배를 내 보이는 차이니즈 비키니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공동체의 전통적인 행동이 다른 집단의 법으로는 ‘범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중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에서 차이니즈비키니를 한다면 경범죄로 처벌 받을 수 있다. 중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이게 왜 범죄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이 대하여 토르스텐 셀린은 문화 갈등이 범죄화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조지 볼드는 인간을 집단적인 존재로 보고, ‘갈등’은 특히 입법과정에서 첨예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힘이 있는 집단은 자기 이익을 법에 반영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집단의 주장은 법에 의해 진압된다. 흑인 민권운동, 개발 반대 시위, 청년 노동조합의 파업이 모두 ‘불법’으로 취급되었던 이유다.
오스틴 터크는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간의 조직화된 권력 구조가 범죄화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반면, 시민들은 조직되지 않으면 무력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의견이 서로 다른 경찰(정부)과 시민들이, 서로 조직력이 비슷해지거나 시민들의 조직력이 더 높은 경우 갈등이 첨예해지고 권력구조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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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의 범죄만 이렇게 자주 눈에 띌까?”
그 질문에 가장 분노했던 사람이 바로 ‘봉거(Willem A. Bonger)’였다. 그는 『범죄성과 경제적 조건』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는 범죄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청소년 노동자 계층에 주목했다. 당시 소년공들은 교육받을 기회도 없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며, 하루 12~15시간의 괴된 노동에 시달리고, 불안정하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봉거는 이들이 범죄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서, 그들의 도덕성의 문제도, 유전적 소인도 아니라고 했다. 사회 구조가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범죄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파산”이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비범죄화’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되묻는 것. 그리고 ‘범죄자’라 불린 이들이 정말 그럴만한 존재였는지를 되짚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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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퀴니는 더 나아갔다. 그는 단지 노동자 계층의 범죄만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범죄도 조명했다. 기업의 탈세, 환경 파괴, 권력형 비리 등은 엄연한 범죄지만, 대부분은 미미한 처벌이나 무혐의로 끝난다고 봤다. 퀴니는 이런 구조를 ‘지배 범죄’라고 부르며, 가난한 자의 생존형 범죄는 ‘적응 범죄’, 조직적인 저항은 ‘저항 범죄’로 분류했다. 그는 범죄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권력자가 정의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즉, 범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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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테일러(Taylor), 월튼(Walton), 영(Young)은 『The New Criminology』에서 “범죄는 때로 의식적인 저항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한 충동이나 일탈이 아니라, 모순된 사회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범죄는 “나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수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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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범죄학의 논리나 주장하는 내용은 설득력이 있어보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주장들이다. 하지만, 범죄자를 사회 구조의 피해자와 같이 선한 존재로 본다면,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어떻게 볼 것이며, 모든 범죄 현상의 발생을 포섭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님에도, 일반이론 처럼 범죄는 자본주의(또는 사회구조)때문이라는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오류 등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물론 유럽쪽에서 활발이 연구되는 주제라 언젠가는 강력한 이론으로 급부상할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하자면, “그럼 죄 지어도 된다는 거냐?, “그렇게 따지면 뭐든 사회 탓이지.” 같은 이야기다.
급진적인 비판일수록 대안은 부족하다. 체제니 시스템을 비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걸 고치고 새로 세우는 건 훨씬 더 복잡하다. 말하자면, 시어머니 노릇은 쉬워도, 며느리 역할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판범죄학자들과 같은 질문들을 계속 던져야 한다. 범죄란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법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법 바깥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