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나올 수가 없다.
계란을 삶았다. 반숙을 한다는 게 완숙이 됐다. 껍질을 벗기니 뽀얀 속살이 수줍은 듯 드러난다. 뽀얀 속살 안에 숨은 노른자의 갈색은 추억의 컬러 팔레트만큼 선명하다. 흐릿한 기억 속 한 장면. 초등학교 입학 전후, 나는 할매 품에서 자랐다. 엄마보다 할매를 더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한순간이 있다.
경주 최부자집 큰딸 최희 여사님이 작고 하셨다. 요즘 보기 힘든 꽃상여를 보면서 어린 시절 꽃 상여가 떠올라 눈시울을 적셨다. 조그만 항구 도시 어느 마을에 꽃상여가 나가던 날 도시락을 받았다. 도시락 안에 계란이 들어 있었다. 할매랑 상여 도시락을 받아서 먹던 기억보다 계란 노른자의 맛이 강하게 남는다. 우리 할매는 나한테 "내 죽으면 니는 도시락 두 개 먹어라"라고 노래 가사를 읊듯이 말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할머니가 손녀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 표현이었나 보다. 얼마 후 울 할매가 아버지가 갑자기 떠난 충격으로 곧 뒤따라 가셨다. 철없던 나는 상여 뒤를 따르며 도시락 2개 먹을 생각만 했다.
울 할매는 집안에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족보가 높은 바람에 덩달아 내 족보도 높아졌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오빠였고, 큰오빠뻘이 조카였다. 어린 나이에 고모, 이모 소리를 듣고 살았다. 울 할매 큰 아들이 일본에서 자수성가를 했다. 한국에 오는 날이면 사돈의 8촌까지 불러서 잔치를 했다. 그때만 해도 편지로 소식을 전하던 시대다. 고만고만한 꼬맹이들 사이에서 나는 당연 고모, 이모였다. 그때는 한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다 보니 아이들 공부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한글을 빨리 깨친 나는 울 할매의 자랑이었다. 집안 식구들만 모이면 나한테 편지를 읽으라고 했다.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할매의 백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일어서서 또랑또랑하게 편지를 읽었다. 뜻도 모른 채 글자만 읽었다. 울 할매가 자존감을 많이 키워준 것 같다. 울 할매는 남의 집 밥 먹으면 거지 된다고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거지 근성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나 보다.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식당 밥, 남의 집 밥은 입에도 대지 못했다. 친구들이랑 도시락을 먹을 때도 내가 싸 온 반찬만 먹고 친구들 반찬은 먹지를 못했다. 할매한테 제대로 세뇌를 당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딴 집 살림을 사는데도 울 할매를 지극정성 모셨다. 그것도 모자라 일까지 하러 다니면서 가장 노릇을 했다. 일본 큰아버지가 도와주기 전까지는 엄청 고생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엄마와 지낸 기억이 별로 없다. 계란 덕분에 할매에 대한 기억을 자주 소환시키고 있다. 울 엄마한테는 결코 만만치 않던 시어머니인데, 나한테는 더없이 좋은 울 할매다. 똑같은 사람인데 관계에서 오는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절실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