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혼수
1937년 1월, 경남 남해의 깊은 산골에서 내 엄마는 태어났다.
참 박복한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요즘 화제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애순이 엄마가 할머니에게 묻는 대사가 유독 가슴에 남는다. “엄니, 이 세상이 소풍이었소, 고행이었소?” 한참을 생각하던 애순이 할머니는 말한다. “소풍이었지.”
내 엄마라면 뭐라고 답했을까. 나는 안다. 엄마에게 세상은, 단 한순간도 소풍이 아니었다. 그 길은 분명, 고행이었다.
“부모복 없으면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 이 말이 이렇게 적중할 줄은 몰랐다. 엄마의 삶은 그 말처럼 한 치 오차 없이 험난했다.
엄마는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품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언니들이 동냥젖을 얻어다 입에 물리며 동생을 키웠다.
강원도 두메산골도 부러워할 만한 깊은 남해의 골짜기. 거기서 엄마는 나고 자랐다. 6·25 전쟁을 겪은 세대였지만, 총성은 멀리서 들릴 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굶주림과 고단함은, 전쟁보다 더 오래 남았다. 딸만 셋이었던 외갓집은 늘 아들의 빈자리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외할아버지는 막내딸의 혼처를 정하면서, 데릴사위를 들였다. 그 사위는, 훗날 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는 아들만 여덟, 딸 하나인 집의 여덟째였다. 딸 부잣집의 막내딸과, 아들 부잣집의 여덟째 아들이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오며 자기 어머니를 혼수로 해온 것이다. 보통 염치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쓸데없는 효심 덕분에 엄마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아홉 살이나 많은 남자와의 결혼. 불같은 성정을 지닌 시어머니와의 동거. 친정에서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지만, 결혼과 함께 삶의 모든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시어머니는 큰 아들집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아 여덟째 아들의 집으로 옮겨왔다. 그 시절에도 큰 며느리와 맞붙어 다툴 정도였으니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기세 등등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삶을 끝끝내 짓누르게 될 줄은.
결혼은 엄마에게 축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감옥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문턱을 넘은 엄마의 삶은, 그날부터 “박복한 년”의 역사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