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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계획표.

난 포기하지 않아.

by 김부부

“방법이 없으실 거 같아요.”


수술하고 그날 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지만.


눈만 감고 있을 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남편과 나는 밤새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퇴원수속을 끝내고 외래진료를 보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 앞에 앉았다.


“수술 후 미세현미경으로 다시 봤지만 검출된 정자는 없었습니다.”


“약물이나 주사치료를 좀 더 하다가 재수술해서 찾을 확률은 없을까요? “


“다 의미가 없어 보이세요. 방법이 없으세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원장선생님과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다 안된다는 부정적인 의사의 반응에 단전 밑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진료실 나가고 싶어졌다.


진료를 다 마치고 나와 병원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난 절대 이 근처도 오지 않을 거다.


‘이놈의 병원을 망해라’


라고 평생 기도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까진게 모라고......


아직 수술부위가 아물지 않아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오는 남편은 회사로 출근을 하겠다고 했다.


집에 가봤자 내 한숨밖에 안 들리게 뻔하고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은가 보다 싶어 그러라고 하고 남편은 회사로 나는 집으로 갔다.


텅 빈 집에 돌아온 나는 시체처럼 누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터질 거 같았지만 눈물도 그다지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머릿속이 하얀 백지가 되어버렸다.


난 20살 때부터 계획형 인간이었다.


대학교 1학년 교양수업 강의시간에 교수님은 이 순간부터 예상 수명을 정해 내가 어떡해 살건지에 대하여 계획표를 짜보라고 하셨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첫 직장은 어느 수준에 회사에 입사할 것인지? 월급은 얼마를 받을 것인지? 몇 살에 어떤 브랜드에 차를 구매할 것인지? 이런 식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성을 정해 보라는 의도이셨던 거 같았다.


난 이 계획표를 계획하는 내내 신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최대한 그 계획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니 그 방향대로 인생이 흘러가고 있었다.


20대 후반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큰 사고였다. 다들 내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나 또한 꽤나 거친 방황도 했었다.


하지만 좌절하기엔 난 아직 너무 젊고 내 인생이 아까웠다.


난 다시 계획표를 짰다. 그렇게 다시 일어났고 남들이 부러워할 회사에 다시 취직도 했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계획표대로 결혼도 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 계획표가 멈췄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불행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왜..... 굳이 꿋꿋하게 일어나 열심히 사고자 하는 나를...... 또다시 쓰러트리려 하는지!


온갖 신들을 소환해 대답 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얼마큼 엉망진창 망가지기를 원해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구냐고!


계속 질문했지만 대답을 받지는 못했다.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이제 행복해지 거라고 결심했는데...... 난 이제 어떡해야 될까?


머릿속이 하얀 백지다. 다시 일어나 힘이 없었다.


남편과 서로 대화도 없이 일주일을 지낸 거 같다.


일주일 동안 밖에도 안 나가고 그냥 침대에만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먹지도 않고 그냥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먹지도 움직이도 않는 나를 남편은 퇴근길마다 음식을 사다 챙겼다. 먹으라고 먹고 다시 누울라고....


정작 수술을 해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편인데 남편이 나를 챙기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시간을 보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젠 현실을 살아야 했다.


남편과 헤어져서 각자 길을 갈 생각이 아니라면 일어나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계획표를 짜야한다. 다시 짜면 됐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방법은 있다.


다시 일어나자. 다시 일어나서 다시 살아보자.


다시 일어났다.


난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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